문화일보 로고


통합 검색 입력
전체
사설
시평
시론
포럼
오후여담
[살며 생각하며]

부음정(孚飮亭)을 보존한 사연

기사입력 | 2020-11-20 11:23

원철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영의정에서 儒家의 역적으로
극과 극 인생 산 ‘내암 정인홍’

스승 남명 조식 선양하던 중
퇴계학파와 충돌후 파문당해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활약
팔만대장경 무탈하게 지키기도


가야산(경남 합천)의 나무들은 이미 잎을 떨구었고, 아랫동네 가을 단풍이 끝물처럼 남아 있던 날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1536∼1623)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1924년 현 위치로 이장했다고 한다. 영의정급 봉분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소박했다. 약간의 석물이 더해지면서 겨우 격을 갖추었다. 묘소를 알리는 안내 표지판과 작은 주차장이 생긴 것도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뒤편 가파른 경사의 은행나무 두 그루에서 떨어진 잎들이 무덤 주변을 황금빛으로 뒤덮었다. 그가 태어날 때 인근 나무들이 3년 동안 잎이 돋지 못할 만큼 상왕봉의 정기를 한 몸에 빨아들인 큰 인물이라는 전설이 생각나게 한다. 남쪽을 바라보니 멀리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이 한눈에 들어왔다.

묘소에서 차로 5분 거리인 부음정(孚飮亭)은 면 소재지의 서북쪽 끝자락, 작은 개울물이 가야산 본류인 홍류동천 계곡물과 만나는 곳에 있다. 본채와 부속건물에 사당까지 갖춘 규모지만, 서원(書院)이란 이름을 마다한 채 정자(亭子)라는 작은 이름을 붙였다. 본래 아래쪽 가야시장 부근 물가에 있었는데 해방 후 지금 터로 옮겼다. 한옥은 해체해 원형 그대로 옮길 수 있는 건축물이다. 옮겨 지을 때 많은 걸 염두에 뒀을 것이다. 주변 풍광까지도 배려한 덕분인지 ‘부음정에 오르며(登孚飮亭)’라는 옛 시의 묘사 장면과 닮았다. ‘냇물 굽이치는 언덕에 자리 잡은, 내 분수에 꼭 맞는 조그만 집이지만 봄 이슬 가을 서리에 맑은 기운이 올라오는 곳’이라고 좋아하던 그의 모습을 현 위치에서 공감하는 일도 어렵지 않다.

45세(1580년) 때 고향에 부음정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했다. 부음(孚飮)이라는 당호도 참으로 특이하다. 당신이 정치적·사회적으로 잘나갈 때 이 집은 문전성시가 되면서 수백 명이 내왕했다. 모이면 술잔이 오가게 마련. 하지만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 그렇다고 금주(禁酒)가 해답은 아닐 터이다.

‘유부우음주(有孚于飮酒)면 무구(无咎)요 유기수(濡其首)면 실시(失是)하나니라.’ 술은 적절하게 마시면 허물이 없거니와 머리끝까지 올라오도록 과하면 실수하게 마련이다.

술을 마실 때마다 균형을 중시했다. 부음은 그런 뜻으로 주역(周易)에서 빌려온 말이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의 방문과 함께 술상을 마주하면서도 품격을 잃지 않았던 선생의 전성기를 대변하던 당호인 셈이다.

남명 조식(南冥 曺植·1502∼1572)은 늘 “정인홍이 있기에 나는 죽지 않는다”고 할 만큼 수제자인 그를 아꼈다. 스승 남명을 선양하던 와중에 퇴계학파와 정면충돌하면서 유가에서 ‘파문’당하는 수모와 이후의 극형도 기꺼이 감수했다. 단재 신채호가 내암의 전기를 쓰고 싶다고 할 정도로 드라마틱한 인생이었다.

이렇게 부음정의 주인장 내암은 ‘영의정’과 ‘역적’이라는 인생의 극과 극을 함께 보여준 인물이다. 조선조를 통틀어 영남 출신 영의정은 하륜·류성룡·정인홍 3인뿐이다. 어쨌거나 영광은 짧았다. 합천을 포함한 낙동강 서쪽 경상우도는 역향(逆鄕·반역의 땅)이라는 굴레 때문에 지역 인재들에 대한 불이익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도 언제나 ‘내 편’인 서산정씨 집안과 지역사회는 그를 끝까지 지켰다. 마침내 1908년 신원(伸寃·사면복권)이 됐다. 근래 몇 년 새 선양운동과 함께 연구서도 나오고 세미나도 열린다. 역적이란 굴레에서 벗어난 지 100여 년 만에 본격 재조명되고 있다.

임진란 때는 의병장으로서 당신 몫을 다했다. 덕분에 팔만대장경도 무탈할 수 있었다. 인근의 대찰인 해인사 때문에 알게 모르게 불교적 영향도 적잖이 받았을 것이다. 승병장인 사명대사 석장비 제막식에 참석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스승의 문집인 ‘남명집(南冥集)’도 처음 해인사에서 판각했고 당신이 서문을 썼다. 호 내암(來庵)으로 미뤄 짐작건대 절집(庵)에도 자주 오갔던(來) 모양이다. 물론 아전인수 해석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보다 더 결정적인 인연은, 절에서 미래의 장인어른을 만난 것이라 하겠다. 11세(1546년) 무렵 해인사에 들어가 책을 읽을 때 일이다. 젊은 관료인 양희(梁喜·1515∼1580)가 공무 차 해인사를 방문한다. 업무를 마친 후 학동(學童) 정인홍을 따로 만났다. 그 결과 석탑과 소나무를 주제로 한 ‘영송(詠松·소나무를 읊다)’이란 글이 나오게 된다. 양희는 해인사 마당에 있는 삼층석탑과 같은 인물이며 자기는 33㎝ 소나무에 비유했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소나무가 자라 석탑을 능가할 것이라는 기개를 숨기지 않았다. 그 기상이 마음에 쏙 들었던 모양이다. 이로 인해 뒷날 그의 맏사위가 된다. 시 한 편만 잘 지어도 장가를 갈 수 있는 그런 시절도 있었던 모양이다….

‘한 자 남짓한 작은 소나무 한 그루가 탑 서쪽에 있네(一尺孤松在塔西·일척고송재탑서)

탑은 높고 소나무는 낮아 서로 가지런하지 않구나(塔高松短不相齊·탑고송단불상제)

오늘 저 소나무가 탑보다 낮다고 말하지 말라(莫言此日松低塔·막언차일송저탑)

소나무가 자란 다음 날에는 탑이 도리어 낮아지리니(松長他時塔反低·송장타시탑반저)’

많이 본 기사 Top5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카카오톡

핫클릭 ✓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