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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경주 문천(蚊川)의 다리들

기사입력 | 2020-10-23 11:29

원철 스님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서라벌 주민과 함께한 수천년
크고 작은 다리들 곳곳에 놓여

원효대사·설총 설화 등 깃들어
많은 이야기 다리와 함께 전해

한일 승려들 징용자 피해 추모
양국 이어주는 민간 가교 역할


숙소 벽에는 세로로 길게 드리워진 작년 치(2019년) 달력이 걸려 있다. 날짜를 보려는 게 아니라 사진을 보기 위한 것인지라 올해도 그대로 두었다. 문화재 사진의 미학자로 불리는 서(徐) 아무개 선생의 작품집을 겸한 까닭이다. 10월 주제는 경주 월정교다. 타원형의 장대한 여러 개의 교각과 긴 회랑에 기와지붕을 씌우고 양쪽으로 문루(門樓)까지 갖춘 누교(樓橋)다. 넓은 강물처럼 보이는 냇물 위에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화려한 모습이 한껏 드러난 순간을 포착했다. 하단부에 적힌 ‘복원한 다리에는 여러 말들이 난무했지만, 탐방객들에게는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옛것을 그대로 두는 것만이 좋은 것일까? 시대가 변하면 보는 방법도 변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작가의 짧은 변(辯)이 감상 포인트가 무엇인지를 일러준다.

새로 만들어진 다리 덕분인지 인근 한옥마을 주변에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예전에 요석궁이라는 한정식집과 최부잣집의 전통주로 상징되던 교촌마을은 ‘꼰대문화’(?)를 대표하던 지역이다. 이제는 카페가 생기고 골목골목에 맛집과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문을 열었다.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이다. 월정교와 몇백 미터 간격을 둔 돌다리에는 웨딩포토를 촬영하는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선남선녀가 저마다의 포즈를 한껏 취하고 있다. 작가는 카메라를 들고 바지를 둘둘 걷어 올린 채 물을 밟으면서 연신 카메라 렌즈를 조절했다. 얼마 후에는 젊은 여성들이 휴대전화로 서로 사진을 찍어 주면서 징검다리 위에서 깔깔거린다.

문천(蚊川·남천이라고도 부른다)에는 많은 다리가 있었다. 서라벌에 도읍한 이래 몇천 년을 주민들과 함께해 온 하천에는 필요할 때마다 크고 작은 다리가 놓였을 것이다. 특히, 냇물을 따라 흐르는 고운 모래가 유명했다고 한다. 반월성에서 내려다보면 맑은 물은 아래로 흘러가지만, 모래는 물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광경을 ‘문천도사(蚊川倒沙)’라고 이름 붙일 만큼 볼거리였다. 그 위치가 어디인지 불분명한 다리 숫자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가 함께 전해 온다. 이름만 남아 있는 ‘유교’와 ‘칠교’에는 문자 기록보다 더 많은 사연이 보태져 부풀려진 채 구전으로 떠돌아다녔다.

유교(楡橋)는 글자로 미루어 짐작건대 느릅나무(楡)를 주재료로 하여 얼기설기 엮은 나무다리였을 것이다. 원효 대사(617∼686)가 이 다리를 건너다가 미끄러져 물에 떨어졌고, 인근 요석공주 처소에서 빨래를 말렸다. 삶 자체가 워낙 격(格)을 뛰어넘는 드라마틱한 생애인지라 무슨 일이건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백성들의 신뢰는 오늘까지도 별로 변함이 없다. 신라의 대학자 설총(薛聰·655∼?)은 화장한 유골을 진흙에 섞어 소상(塑像)을 제작해 분황사에 모셨다. 그때 소상은 아들을 향해 고개를 돌린 채 그대로 멈췄다고 한다. 뒷날 이 모습을 만난 고려 말 일연 선사(一然·1206∼1289)는 삼국유사에 ‘달 밝은 요석궁에 봄잠 길더니(月明瑤石春眠去) 문 닫힌 분황사에 돌아보는 모습만 허허롭구나(門掩芬皇顧影空)’ 하는 시를 남겼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는 스스럼없이 “원효 ○○대손입니다” 하면서 자기를 소개한 이를 만났던 기억까지 문득 떠오른다.

칠교(七橋)는 징검다리였다. 아녀자 걸음으로 일곱 걸음 정도로 건너갈 수 있는 거리라면 냇물 폭이 그다지 넓지 않은 곳일 것이다. 그런데 젊은 홀어머니가 밤마다 개울을 건너 이웃 마을의 정인(情人·남친)을 만나러 다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들이 개울물에 몰래 돌다리를 놓았다. 물을 건너는 어머니의 버선발이 젖지 않도록 효도를 다한 것이다. 그래서 이름이 효교(孝橋)가 되었다. 여기까지는 팩트다.

하지만 그때도 그 후에도 ‘소설가’는 많았다. 징검다리의 돌 숫자가 일곱 개이니 아들이 7명일 것이라는 추측도 나돌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일곱 아들은 뒷날 죽어서 북두칠성이 됐다는 속설까지 등장했다.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칠성신앙의 영향일 것이다. 가부장적 권위주의 시대에는 ‘이런 행동은 효도가 아니라 오히려 불효’라고 목소리가 드높았다. 그러나 개명 사회의 양성평등주의자들은 그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끝에 겨우 양측이 합의를 했다. 효도와 불효가 동시에 이뤄진 효불효교(孝不孝橋)로 다리 이름을 바꾼 것이다. 이처럼 작명에는 알게 모르게 시대적 가치관이 반영되게 마련이다.

눈에 보이는 다리가 있는가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다리도 있다. 소리 소문 없이 한국과 일본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묵묵히 해오던 경주 외동 수곡사(水谷寺)에서 열린 추모재에 도반들과 함께 참석했다.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일본 나가사키(長崎)현 이키노시마(壹岐島)의 덴토쿠지(天德寺) 승려들은 오지 못했다. 일본 사찰에는 1945년 해방이 되면서 귀국하던 배가 태풍을 만나 숨진 유골 몇백 기가 봉안돼 있다. 매년 10월이면 한·일 양국의 승려들이 뜻을 모았다. 격년으로 상대방 사찰을 방문해 영혼을 달래주는 행사를 통해 민간 외교사절 역할을 했다. 수십 년 동안 형체 없는 다리를 만든 셈이다.

다리의 소임은 양쪽을 이어주는 일이다. 옛 월정교는 남산과 왕경(王京)을 이어주고 새 월정교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준다. 작은 섬 이키는 규슈와 쓰시마(對馬島) 두 지역을 지리적으로 잇는 짧은 징검다리라 하겠다. 이제 종교인들의 노력으로 한국과 일본을 이어주는 또 다른 큰 다리 노릇이 추가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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