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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관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분업과 특화는 경제 진보 원천
경제 과제도 한국 고유의 특성
수학·통계학 치중 美이론 한계

이젠 한국적 경제학 추구할 때
‘한국경제혁신센터’ 서두르고
민·관·학 협력해 지혜 모아야

실물경제에선 분업과 특화, 그에 따른 교환이 경제적 진보의 원천이다. 국가 간에도 생산 효율성에 따른 국제 분업이 자유무역을 통해 경제성장을 촉진한다. 경제 현실에서 분업과 특화에 따른 교역은 바람직하다.

재화 생산의 국제 분업 논리에 따라 경제학 연구도 국제 분업에 맡기면 어떨까. 경제학 연구는 재화 생산과 다르다. 화폐를 예로 들어 보자. 우리가 찍어 내는 원화와 미국이 찍어 내는 달러는 국제적 수용성과 화폐로서의 제반 기능이 같지 않다. 30년간의 고도성장이 멈추고 지난 25년 이상 추세적 성장률 하락을 겪고 있는 우리의 거시경제 문제는 미국이 겪는 경기변동 문제와 다르다. 분단국가인 우리의 남북문제, 저출산과 급속한 고령화 문제 등에 대한 해법 역시 우리 경제학자가 풀어야 할 한국형 경제문제다.

우리의 많은 경제학과 졸업생이 1980년대에 대거 미국으로 유학 갔다. 우리 유학생은 영어와 수학 중 상대적으로 수학이 편했다. 자연스레 이들은 다양한 경제학 분야 중 수학과 통계학이 많이 사용되는 전공으로 몰렸다. 경제학 연구의 국제적 분업 구조 속에서 우리의 예비 경제학자는 기술적(technical) 분석에 치중했다. 그래야만 국제경제학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고의 경제학자가 쓴 논문에 주로 등장하는 단어는 인플레이션, 실업률, 경제성장, 기술 혁신 등 현실 경제의 언어가 아닌 일반균형, 게임이론, 최소자승법, 가설검증 등 수학과 통계학에 특화된 용어가 많다.

경제학 연구의 국제 분업 체계에 따라 우리가 배출한 최고 경제학자가 수학 문제, 통계 문제에 매달리는 사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경제 현안은 학계 논의에서 소외된 채 이따금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 학자의 가벼운 논평 거리로 전락했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과정에서 강조된 통화 긴축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과정에서 강조된 통화 완화는 유사한 원인에 대한 180도 다른 처방이었다. 이런 차별에 대해 왜 1997년에는 긴축이, 왜 2008년에는 완화가 정당했는지 따지고 들어갈 사람은 아시아와 한국의 경제학자일 수밖에 없다. 한데, 경제학 연구의 국제적 분업은 이런 역할을 담당할 우리 경제학자를 키워 내지 못한다. 그간 우리 경제학자는 한국형 경제문제에 터 잡은 이론을 개발하지 못한 채 미국 중심의 경제 이론을 차입해 사용해 왔다. 수입된 이론에 근거한, 그마저도 기술적 분석에 치우친 우리 경제학자의 해법은 국내의 성장 침체와 분배 악화 해결에 무기력했고, 우리의 국익을 지키는 데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경제학 연구의 기형적 국제 분업에는, 우리 유학생이 영어보다 수학에 우위가 있었다는 점 말고 우리 사회의 학자 평가제도도 한몫했다. 국제적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면 내용이 수학이든 통계학이든, 우리 경제 현안을 분석했든 안 했든 최고의 평가를 받는다. 우리 경제 현실을 분석한 논문은 영어와 영미 경제가 중심이 된 국제 학술지에 게재되기 어려워 합당한 평가를 받을 수 없다. 학자 개인으로서는 유학 시절에 하던 연구를 국내 복귀 후에도 지속하는 게 유리하다. 좋은 평가도 받고 새로운 도전을 안 해도 된다. 이런 왜곡된 유인 구조에서는 제대로 된 ‘한국경제학’의 탄생을 기대하기 어렵다.

필자가 미국에서 학위 과정과 교편생활을 마치고 1995년 귀국했을 때, 감사하게도 주위의 많은 선배 교수가 한국적 경제학을 연구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당시 필자는 민주주의든 경제학이든 보편적 용어에 한국적이란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국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이후 사반세기가 지났다. 2020년 현재 한국적 민주주의는 안 되지만 한국적 경제학은 필요하다고 본다.

한국경제학의 정립을 통해 한국경제가 처한 제반 위기를 해결해 나가는 데 경제학계는 지혜를 모아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경제학 연구의 본산이 될 ‘한국경제혁신센터’를 설립해야 한다. 그간 수백 명의 기부자와 언론이 동참했고, 82억 원의 정부 예산까지 배정됐다. 이 센터를 중심으로 한국경제의 경험과 문제점을 이론화하고 한국경제에 뿌리를 둔 세계적 수준의 경제학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 우리의 현실 경제 문제에 유용한 경제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 민·관·학이 협력해 경제학 연구에서 수입과 수입 대체를 넘어 자체 브랜드를 생산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