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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숙 논설위원

‘日징용기업’ 자산 현금화 논란
한·일 관계 파국 뇌관으로 부상
미·중 패권 전쟁 속 한·일 갈등

中 좋은 일일 뿐 한국엔 反국익
국회 입법 통해 징용 문제 해결
문희상案 적극 추진할 만하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만 없으면 풀릴 것 같던 한·일 관계가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 취임 한 달 만에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스가 총리가 한국에서 열릴 예정인 한·중·일 정상회의 참석 조건으로 징용 관련 일본 기업의 자산 현금화 조치 중단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스가 총리는 이 같은 입장을 지난 9월 말 한국에 전했다. 스가 총리 측근인 가와무라 다케오(河村建夫) 일·한 의원연맹 간사장이 17일 방한,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김진표 한·일 의원연맹 회장, 그리고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까지 두루 만난 것은 한국에 징용 문제 해결 의지가 있는지 엿보기 위한 행보로 보인다.

일본 기업 자산 현금화 조치는 법원의 판결에 따라 12월 초부터 가능해지는데, 강행 여부에 따라 한·일 관계가 회복불능 상태로 빠지느냐, 복원으로 가느냐 판가름날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사법부 결정을 행정부가 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할 경우 자산 매각은 강행될 것이고, 한·일 관계는 루비콘 강을 건너게 된다. 일본은 지소미아 파기 결정 때보다 강도 높은 경제·금융 보복 카드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이럴 경우 한·일이 아무리 미국의 동맹국이라 해도 국제 사회에서 양국 공조는 물 건너가고, 한·미·일 북핵 폐기 협력도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미·중 전략 경쟁 국면에서 한·일 양국이 치고받고 싸우는 것은 중국엔 호재고, 미국엔 악재다. 미국의 동북아 동맹 구조 틀을 깨려는 중국은 한국이 과거사 문제로 일본과 싸우면서 한·미·일 협력 틀에서 이탈하려는 것에 대해 쾌재를 부르고 있다. 반면 미국은 한·일 과거사 충돌로 인해 한·미·일 안보 공조가 흔들리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북핵 저지 공조는 물론이고 한반도 유사시 일본의 협력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가 고착되면 동북아에서 미국 파워는 밀려날 수밖에 없다. 한·일 갈등은 중국 패권 확장의 촉매제 역할을 하며 한국의 중국 경사를 재촉한다. 죽창가를 앞세운 문 정권의 반일(反日) 여론몰이를 중국이 부추기는 것은 중국 국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문 정권의 반일정책은 중국에만 좋은 일일 뿐 대한민국 안보엔 치명적 독이 되는 것이다.

문 대통령의 국정 스타일은 시간을 끌고 미적거리다 어쩔 수 없을 때 마지못해 대응하는 식이다. 리스크를 감내하며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적도, 선제 대응한 적도 없다. 코로나19 초기 확산 방치나 북한군의 해수부 공무원 총살·소각사건 대응이 대표적이다. 일본 기업 자산 현금화 조치도 방관할 가능성이 큰 만큼 국회가 나서야 한다.

제20대 국회 때 문희상 당시 국회의장이 징용 갈등 해결 특별법을 제안한 바 있다. 한·일 기업 등의 기금으로 재단을 만들고 징용 피해자에게 위로금을 지급해 일본 기업 자산 매각은 막자는 게 골자다. 문희상 안(案)은 20대 국회 종료로 자동 폐기됐지만, 윤상현(무소속) 의원이 이를 그대로 살린 ‘기억·화해·미래재단법안’과 ‘강제동원 희생자 지원 특별법 개정안’을 제안, 소관 위원회 심사가 진행 중이다. 가와무라 간사장도 18일 이낙연 대표와 김종인 위원장 등과의 회동 때 문희상 안을 주로 얘기했다고 한다. 이 안으로 징용 갈등을 풀고 막힌 한·일 관계를 뚫자는 스가 총리의 의지로 볼 수 있다.

미국 대선을 보름여 남겨놓고 국제 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여론조사로는 핵심 경합주에서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앞서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코로나19 확진 후 회복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추격도 만만치 않다. 우편 투표 개표가 늦어지면서 선거 당일 승자 발표가 어려울 수도 있고 친트럼프 세력과 반트럼프 세력의 충돌 기류도 뚜렷해져 어떤 결과가 나오든 당분간 대혼란은 불가피하다. 미국이 대선 후유증에 빠져들면 혼란을 틈타 북한이 핵·미사일 도발을 할 수도 있어 한국이 초유의 안보 쇼크에 빠질 수도 있다. 이런 때일수록 자유 진영과 연대·협력을 강화해 외교 안보 변수를 줄여야 한다.

미·중 패권 전쟁은 바이든 시대가 열리든 트럼프 시대가 지속되든 격화할 것이고 중국의 국수적 강압 외교에 맞서기 위해 한·일이 협력할 일은 많아질 것이다. 더 큰 위기가 닥쳐오기 전에 외교 갈등 요소를 줄이고 협력의 틀을 넓혀야 한다. 한·일 징용 갈등 해결은 한·일이 서로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미래 지향적 전략을 논의하기 위한 첫 단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