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로고


통합 검색 입력
전체
사설
시평
시론
포럼
오후여담
[살며 생각하며]

언택트 시대 탱고의 진화

기사입력 | 2020-10-16 11:41

김이재 지리학자, 경인교대 교수

탱고는 긴장감 넘치는 고난도 춤
상대방 육체·영혼 온전히 소유

언어·국경 뛰어넘게 하는 마법
뇌질환·우울증 치료에도 활용

코로나로 밀접 접촉 어려운 시대
탱고 전문 AI 로봇 나올 만도 해


베를린의 전설적인 밀롱가, ‘탱고 로프트(Tangoloft)’가 폐업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밀롱가(milonga)는 탱고를 즐기는 사람들이 모이는 시·공간을 말한다. 그동안 가파르게 치솟은 임차료로 힘들어하던 운영자들에겐 코로나19가 직격탄이었던 것같다. 베를린의 자유로운 영혼들은 마지막 숨통이 끊기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코로나19 여파로 밀롱가가 문을 닫자 평소 마음에 들었던 파트너와 살림을 차린 커플도 생겼다. 지금 전 세계는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만나는 사람과 ‘코로나19 때문에’ 못 만나는 사람의 구분이 뚜렷해지고 있다.

18세기 프로이센왕국의 수도였던 베를린은 반전 매력을 지녔다. 꽃과 촛불로 장식된 밀롱가에서 애잔한 선율에 맞춰 탱고를 추는 사람들을 보면 ‘딱딱한 독일 병정’ 이미지는 눈 녹듯 사라진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서독으로 분단되며 날개가 찢겼던 베를린은 장벽이 붕괴되자 화려한 비상을 시작했다. 냉전이 끝나고 현대 미술의 거대한 실험장이 된 베를린은 ‘탱고의 메카’로 거듭났다. 하지만 관광객이 몰려들고 부동산 광풍이 불자 탱고를 추던 학생·예술가·이민자부터 밀려났다. ‘가난하지만 섹시했던’ 대학도시는 ‘지루하고 평범한’ 부자도시가 돼 간다.

남녀가 부둥켜안고 추는 탱고는 ‘음란한 춤’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막상 스텝이 시작되고 춤에 몰입하면 딴생각할 틈이 전혀 없다. 오직 음악과 파트너의 동작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우아한 탱고가 완성된다. 그래서 ‘음악이 흐르는 딱 3분간만 내 남자’라는 표현도 생겼다. 하지만 3분이 어딘가. ‘100세 시대’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지만, 한 사람의 육체와 영혼을 온전히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 탱고의 매력이다. 탱고를 언뜻 보면 남성이 주도하는 ‘마초의 춤’ 같지만, 여성이 무력하게 끌려만 가진 않는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남녀가 연결을 유지하며 공간도 확보해야 하는 고난도의 춤이다.

탱고 공동체 구성원 간의 연대감은 끈끈하다. 핀란드에서 탱고는 남녀노소 다함께 추는 국민 댄스다. 핀란드인들은 자작나무 냄새가 향긋한 사우나와 탱고를 즐기며 혹독한 겨울 추위를 이겨낸다. 1910년대 파리를 휩쓴 탱고에 매혹된 한 러시아 유학파 발레리노가 북유럽의 쓸쓸한 정서와 청정한 자연이 연상되는 ‘핀란드 탱고(FINtango)’를 유행시켰다. 매년 7월 야생화가 한창인 핀란드 서부의 소도시 세이네요키에서는 흥겨운 탱고 축제가 펼쳐진다. 좌뇌와 우뇌를 골고루 쓰게 하는 탱고는 치매를 예방하고 뇌졸중·파킨슨병 환자의 증상을 개선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탱고 요법(tango therapy)’이 발달한 영국에서는 뇌질환뿐 아니라 척추 교정과 우울증 치료에 탱고를 활용하기도 한다.

탱고는 언어와 국경을 뛰어넘게 하는 마법이다. 춤을 추며 현지인과 쉽게 친구가 되고 낯선 문화의 속살을 체험할 수 있다. 나아가 탱고를 능숙하게 춘다는 것 자체가 성숙한 인격과 교양의 보증수표다. 기본적인 매너와 성실성을 겸비한 사람만이 예민한 접촉이 계속되는 밀롱가에서 살아남는다. 탱고는 특히 남성이 여성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즐기는 경지에 오를 수 있는 춤이다. 실제로 탱고를 잘 추는 남성은 전 세계 어디서든 귀한 존재가 돼 돈·권력·키·나이·외모에 상관없이 여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또한, 밀롱가는 현재 그 사회에서 유행하는 음악·취미·패션·향수 등 최신 문화 트렌드를 한 번에 파악하기 좋은 곳이다. 오감을 열고 탱고를 추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만 해도 한 도시의 특성이 순식간에 스캔된다.

탱고는 고단한 삶에 지친 외로운 영혼들을 위로한다. 탱고의 원산지는 부에노스아이레스다. 스페인어로 ‘좋은 공기’를 뜻하는 이 도시에는 탱고 음반·기념품을 비롯해 탱고 슈즈·드레스를 파는 가게, 공연장·클럽 등 탱고 관광 생태계가 촘촘하게 발달해 있다. 탱고의 성지를 순례하는 외국인이 늘자 탱고 전문가를 영입해 돈을 받고 밤새 손님과 춤추게 하는 ‘택시 댄서’ 제도가 생겼다. 아르헨티나 경제가 추락해 생활고에 시달리던 택시 댄서들은 고향을 떠나 미국·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일본·싱가포르를 거쳐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까지 진출했다. 세계 각지에서 성업 중인 그들이지만 유독 한국에선 발을 붙이지 못했다. 홍익대 인근 마포를 중심으로 자율적이고 건강한 탱고 공동체가 발달한 데다 수준 높은 탱고를 구사하는 한국 남성층이 두꺼워서다. 오직 탱고만을 위해 한국을 찾는 여성 관광객이 있을 정도로 서울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탱고 도시’로 우뚝 섰다.

코로나19는 글로벌 탱고 생태계를 초토화하는 중이다. 매년 8월 아르헨티나를 뜨겁게 달구던 세계 탱고선수권대회마저 올해는 온라인으로 진행됐다. 방역 수칙을 엄수하는 서울에서 밀롱가가 조금씩 열리고 있지만 활기는 예전 같지 않다. 비좁은 공간에서 여럿이 부대끼며 즉흥적으로 탱고를 추던 시절이 다시 올 수 있을까? 울적한 마음에 ‘탱고, 인공지능(AI)’을 주요어로 인터넷을 검색해 본다.

신형 청소기, 잔디 깎는 기계 등 별 ‘영양가’ 없는 정보들 사이에 ‘춤추는 AI 로봇 실험 중’이라는 뉴스가 눈에 띄었다. 문득 샌프란시스코 밀롱가에서 만난 친구 생각이 났다. 실리콘밸리의 테크 기업에서 일하는 그에게 메신저로 안부를 전하며 기발한 사업 아이템을 제안해 본다. “이참에 탱고전문 AI 로봇을 개발해 보면 어때? 값비싼 아르헨티나 여행 비용도 기꺼이 지불했던 탱고 마니아들이 환호할 거야. 특히, 자신에게 딱 맞는 파트너가 필요한 여성들이.”

많이 본 기사 Top5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카카오톡

핫클릭 ✓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