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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 없는 유아인… ‘소리 없이’ 강하다

김인구 기자 | 2020-10-14 10:28

영화 ‘소리도 없이’에서 태인(유아인·왼쪽)과 창복(유재명)이 끔찍한 범죄 현장의 뒤처리를 하기 위해 우비를 입고 손에 장갑을 끼는 모습. 유아인은 말 없는 무표정으로, 유재명은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으로 아이러니를 자아내고 있다. 영화 ‘소리도 없이’에서 태인(유아인·왼쪽)과 창복(유재명)이 끔찍한 범죄 현장의 뒤처리를 하기 위해 우비를 입고 손에 장갑을 끼는 모습. 유아인은 말 없는 무표정으로, 유재명은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으로 아이러니를 자아내고 있다.

■ 내일 개봉 영화 ‘소리도 없이’

시체유기 뒤처리로 돈 챙기는
성실한 범죄조직 하청업자역
수다쟁이 유재명과 호흡 볼만

유괴된 아이 떠맡으며 ‘균열’
스릴러 옷 입은 블랙코미디물

존댓말 사용하는 범죄자처럼
위트 유지하며 ‘편견’ 깨뜨려


순제작비 13억 원이면 사실상 독립영화 수준이다. 주연배우 한 명의 출연료가 수억 원에 달하는 충무로 현실에서 좀처럼 만들어내기 힘든 제작 규모다. 유아인·유재명 두 주연배우가 개런티를 크게 양보하거나, 제작사가 초인적으로 비용을 절감하지 않았다면 빛을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잘나가는 유아인이 작은 영화 ‘소리도 없이’(홍의정 감독)를 택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어 보인다.

더구나 한마디 말도 없는 태인을 연기하기 위해 삭발하고 몸을 15㎏이나 불린 것을 보면 홍의정 감독이 직접 쓴 시나리오에 얼마나 반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유아인은 제작보고회나 언론 시사회 후 기자간담회에서 연신 홍 감독을 극찬했다. “놀라운 시나리오에 끌려 이 작품을 선택했다. 대사 없는 연기가 편하면서도 도전이었다.”

창복(유재명)과 태인은 생계를 위해 기막힌 부업을 하는 동료다. 평소엔 트럭에 계란을 싣고 다니면서 팔지만 종종 범죄조직의 ‘뒤처리’를 해주고 돈을 챙긴다. 고문과 협박 현장을 세팅하거나 정리하고, 시체를 야산에 파묻는 일이다. 참으로 끔찍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고문이나 살인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고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는 모습에서 오히려 성실함과 근면함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이 저지르는 엄청난 범죄와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소리냐고? 여기서 유아인·유재명의 연기와 그 바탕이 된 홍 감독의 시나리오 및 연출이 반짝반짝 빛난다.

유아인은 트럭 조수석에서 침 흘리며 잠에 빠진 모습으로 태인의 캐릭터를 단번에 관객에게 던진다. 피가 튀지 않도록 우비에 샤워 캡을 쓰고 거울 속 자신을 멍하게 바라보는 표정, 옷을 갈아입을 때 드러나는 두툼한 어깨는 몇 마디 대사보다 훨씬 강력하게 태인을 구체화한다.

반대로 창복은 수다쟁이다. 태인의 몫까지 더해 외부와 커뮤니케이션하고, 심지어 태인에게 잔소리를 쏟아붓는다. “뭘 하든 겸손하게 감사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야” “실장님 소리 듣다가 저렇게 갑자기 가는 거다” “저녁에 꼭 기도해라” 등등.

범죄 스릴러의 옷을 입었으나 왠지 블랙 코미디 같은 분위기로 흐르는 까닭은 전적으로 홍 감독 연출의 힘이다. 범죄 누아르에서 흔히 보이던 것들, 예를 들어 무자비한 폭력과 욕설, 선혈이 낭자한 장면은 거의 없다. 되레 범죄의 현장임을 순간 잊게 할 정도로 사람들의 행동이 태연하고 관계가 정갈하다. 창복과 태인은 물론, 마주치는 모든 범죄자는 마치 협력업체 직원처럼, 유치원 교사처럼, 식당 주인처럼 예의 바르게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그냥 그렇게, 하던 대로만 하면 그것이 정작 무시무시한 범죄여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지던 순간에 균열이 생긴다. 창복과 태인이 유괴된 소녀 초희(문승아)를 엉겁결에 떠맡게 되면서 이들의 ‘비정상적 일상’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아무리 성실해 보여도 시체를 유기하고, 어린이 유괴에 가담하는 이들은 어떤 이유로도 용서받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홍 감독은 끝까지 낭만과 위트를 포기하지 않는다. 집에서 도망친 초희를 찾아 태인이 들판을 헤매는 장면에서도 도망치는 자의 절박함이나 추격하는 자의 집요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에서 소금을 뿌린 것 같은 하얀 꽃의 들녘처럼 환한 보름달 아래 드러난 들판은 차라리 낭만적이다.

아이러니로 편견을 깨는 작업도 계속된다. 욕 대신 존댓말을 쓰는 범죄자들과 그들의 소극적 행동을 통해 선과 악의 고정관념을 부순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서 죽다 겨우 살아난 기우(최우식)가 ‘경찰 같지 않은 경찰’과 ‘의사 같지 않은 의사’를 대면하게 되는 것을 연상시킨다고 할까?

이 대목에서 1997년 화제를 모았던 대우자동차 레간자의 TV 광고가 문득 뇌리에 스친다. 정숙한 실내 주행 성능을 강조하기 위해 ‘쉿, 소리 없이 강하다’는 카피를 썼는데 당시 큰 인기와 함께 레간자의 성공을 견인했다. 유아인은 그처럼 아무 ‘소리 없이’도 강했다.

그는 “내가 선하다고 믿는 행동의 끝이 선한 것인가, 악하다고 믿는 정보가 온전히 그 자체로 진리인가 하는 생각을 했을 때 짊어져야 할 고민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인으로 사는 삶과 개인의 가치관에 옳고 그름이 존재하는가, 선악을 너무 쉽게 나누는 것은 아닌가, 너무 쉽게 판단하고 평가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고민들을 영화적이지만 간결하고 편안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이 영화가 주는 매력”이라고 말했다. 15세 관람가.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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