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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와 시각]

美 흔드는 참전용사 비하 발언

김석 기자 | 2020-09-14 11:38

김석 워싱턴 특파원

5∼6년 전쯤 할리우드에서 드물게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아메리칸 스나이퍼’라는 영화를 봤다.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저격수로 불린 크리스 카일을 다룬 영화였는데 개인적 취향이겠지만 영화 구성이나 전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 마지막에 붙은 카일의 실제 장례식 장면을 보는 순간 이 영화는 기자의 뇌리에 각인됐다.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수많은 오토바이가 카일의 시신이 실린 하얀색 리무진을 인도했고, 거리에는 시민들이 나와 성조기를 흔들었다. 카일의 장례식이 열린 미식축구 경기장은 애도객들로 가득 찼고, 관은 백파이프 부대의 인도하에 운반됐다. 참전용사에 대한 미국민의 존경과 예우를 보여주는 동시에 미국이 세계 강대국으로 군림하는 이유를 웅변하는 장면이었다.

미국에서 지내다 보면 참전용사를 대하는 미국민의 남다른 자세를 접하게 되는 일이 드물지 않다. 작은 시골 마을에 갔을 때 1·2차 세계대전, 한국전,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마을 청년들의 이름을 새겨놓은 비석을 본 적도 있고, 섬마을에서는 가로등마다 자기 마을 출신 전사자 사진과 복무 기간을 적은 현수막이 걸려 있기도 했다. 기자가 자주 가는 마트 주차장에는 참전용사 전용 주차구역도 있다. 참전용사들에 대한 존경과 예우가 극진한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참전 용사 비하 발언 의혹은 선거판 자체를 흔드는 대형 변수다. 미 시사지 애틀랜틱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프랑스 방문 중 우천을 이유로 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1800명 미 해병대원 묘지 참배를 취소하면서 “내가 왜 가야 하나? 그곳은 패배자들(losers)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그 후에도 전몰용사들을 ‘호구들(suckers)’이라고 불렀다. 이에 이라크전 참전용사인 장남 보 바이든을 2015년 암으로 떠나보낸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는 “내 아들은 호구가 아니었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반(反) 트럼프를 내세운 전직 공화당 정부 인사 모임인 링컨프로젝트는 “그의 수준을 보여주는 발언”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이끌 군을 모욕하는 병역기피자”라고 비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애틀랜틱 보도 직후 트위터에 자신이 세계 각지의 미군 부대를 방문하고, 참전용사를 초대한 행사를 담은 장면이 담긴 1분짜리 영상을 올리며 진화에 나섰다. 노동절 휴일에는 예정에 없던 기자회견을 열고 “짐승이나 그런 소리를 한다”며 강력하게 부인했다. 정치적 이슈와 거리를 둬왔던 멜라니아 여사는 물론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까지 총출동했다. 대통령 등 위정자는 나라를 위해 군인에게 죽음까지도 요구하는 사람들이다. 적과 전쟁이 벌어지면 희생자가 나올 수밖에 없다. 또 적을 섬멸하려면 어쩔 수 없이 미끼 역할을 해야 하는 부대도 있다. 군인에게 목숨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위정자는 항상 군인들에게 자신의 희생이 헛되지 않다는 점을 각인시켜야 한다. 자신의 희생이 헛되다고 느끼는 군대를 거느리고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사실이라면 스스로 위정자 자격이 없다고 선언한 셈이다. 현충일 행사에 천안함·연평해전 참전용사 및 유족을 제외하고, 북한군 눈치 보기에 급급하며, 아들 휴가에 군필자 누구도 이해 못 할 변명을 늘어놓는 후안무치한 한국 정치인들도 스스로 위정자 자격이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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