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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물소리 듣기 위해 수성동을 찾다

기사입력 | 2020-09-11 11:33

원철 스님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청계천의 발원 인왕산 수성동
물소리가 인상적이라 地名으로

나가면 市內 들어오면 山이라
그야말로 非山非野의 명당이다

김정희·박윤묵 선인들처럼
폭우 내린 뒷날 계곡을 찾았다


한양도성 한가운데를 흐르는 청계천의 발원지는 인왕산 수성동 계곡이다. 지명 수성(水聲)은 그냥 ‘물소리’다. 그런데 물소리라는 말을 그대로 지명으로 삼았다. 그렇게 할 만큼 옛사람들에게 이곳의 물소리는 인상적이었나 보다. 그런데 제대로 된 물소리는 듣고 싶다고 언제나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큰비가 내릴 때라야 비로소 감상할 수 있는 시간적 한계성을 지닌 물소리다. 그래서 더욱 귀한 물소리가 된 것이다. 일시적이어서 더욱 아름답다고나 할까.

추사 김정희도 ‘수성동 계곡에서 비를 맞으면서 폭포를 보았다’는 제목으로 시를 남겼다. 또, 중인 출신이지만 정조에게 발탁돼 규장각 서리로 근무했던 존재(存齋) 박윤묵(1771∼1849)은 ‘큰비가 수십 일이나 내려… 개울이 빼어나고 폭포가 장대하며 예전에 보던 것과 완전히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사라지고 없는 그 물소리는 또 다른 아쉬움을 남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최상 상태의 ‘수성’을 붙인 모양이다. 수성이란 이름을 통해 찰나(刹那) 속에서 영겁(永劫)을 보고자 하는 바람을 알게 모르게 반영한 것이다.

구경 가운데 물 구경이 으뜸이라고 했다. 자연과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의 소유자인 추사와 존재 선생은 비 오는 날 물소리를 듣기 위해 수성동을 찾은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나막신을 신었다는 사실을 애써 강조했다. 나막신은 평소에 신는 신발이 아니다. 비가 오면 짚신 가게 아들을 걱정하고 날씨가 맑으면 나막신 가게 아들이 걱정이라는 속담에서 보듯, 맑은 날과 비 오는 날의 신발은 달랐다. 비 오는 날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집 콕’했을 것이다. 나막신을 신고 우비를 입고 외출한다는 것 자체가 개인적으로 매우 큰 일인 것이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나막신은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두 어른에게 비 온 뒤 물 구경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꼭 해야만 하는 과제였다.

어쨌거나 모든 것은 타이밍이다. 선인들처럼, 태풍을 따라온 폭우가 내린 뒷날 수성동 물소리를 듣기 위해 이른 아침 계곡을 찾았다. 나막신 대신 운동화를 신었다. 경남 합천 가야산에 머물 때도 큰비 뒤에는 언제나 홍류동 계곡으로 물 구경을 갔다. 농산정 앞 계곡은 수평으로 넓게 흐르는 물이 좋았고, 낙화담 절벽은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수가 볼 만했다. 최치원은 세상의 시비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 농산정 앞 물소리를 귀를 막는 데 사용했고, 일제강점기에 ‘가야산19제영(題詠)’을 지은 예운 이동식 거사는 설사 도인일지라도 낙화담 앞에서는 감정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노라고 읊조렸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멀리 있으면 접근성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가까워야 수시로 갈 수 있다. 아예 눌러앉아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수성동은 ‘나가면 시내(市內), 들어오면 산’인 그야말로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명당이다. 계곡 바위와 소나무를 정원의 분재처럼 집 안으로 끌어들인 이는 세종의 삼남 안평대군이다. 조경이란 경제력과 권력만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시간이 켜켜이 쌓여야 하기 때문이다. 최적의 자리 덕분에 집 짓는 비용으로 태곳적 조경까지 덤으로 얻었다.

자연 정원이지만 집 안 정원으로 삼아도 좋을 만큼 면적도 적당하다. 부친 세종은 ‘항상 장자(문종·단종)를 잘 섬기라’는 당신의 정치적 속내를 담아 당호를 ‘비해당(匪懈堂)’이라고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시와 글씨, 그림까지 능한 셋째 왕자는 문자 그대로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으름 없이’(夙夜匪懈·숙야비해) 살았다. 눈·귀·코·입 등 여섯 감각기관이 항상 깨어 있어야 해 뜰 때와 해 질 때 그리고 눈비 오는 날은 말할 것도 없고 계절과 계절 사이의 미묘한 변화까지 제대로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 계곡에는 반드시 소품처럼 인공다리가 더해지기 마련이다. 진경산수의 대가인 겸재(謙齋) 정선의 ‘수성동’ 그림에도 다리는 빠지지 않았다. 벼랑에 비단 한 폭을 걸어 놓은 것 같은 폭포 모습과 물소리를 가까이 다가가 감상하면서 이 세상 바깥에서 노니는 듯한 기분을 느끼기 위한 최소한의 인위적 장치인 셈이다. 폭이 좁으면서도 풍광이 뛰어난 자리를 골라 기다란 ‘통돌’ 두 개를 나란히 붙여서 통나무처럼 걸쳤다. 3m 남짓하지만 조선에서 가장 긴 통돌다리인 기린교(麒麟橋)가 됐다.

여기에 나오는 기린은 동물원이나 아프리카 국립공원에서 만날 수 있는 그 기린(giraffe)이 아니다. 뛰어난 인재를 상징한다. 비 오는 날 이곳을 찾아올 정도의 부지런함과 자연 공감 능력을 갖춘 것도 감성(EQ)지수가 높은 훌륭한 인재의 자질이다. 마지막으로 이 다리를 통과한다면 그대로 등용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실물은 서울시 문화재인 까닭에 울타리 너머에서 눈으로만 살펴야 했다.

상상 속의 짐승 기린은 뿔 달린 사슴 모양에 온몸에 비늘이 덮인 말발굽을 가진 동물로, 태평성대에 나타나는 상서로움의 상징이다. 후대에는 집안을 일으킬 뛰어난 인재를 의미하는 ‘기린아(麒麟兒)’로 언어적 진화를 했다. 하지만 추사 선생은 가문을 빛내는 것으로 만족하는 이기적인 기린아들이 마뜩잖았던 모양이다. 이 세상까지 함께 맑히려는 의지를 갖췄을 때 비로소 진정한 기린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수성계곡에서 폭포수의 힘을 빌려 질책했다.

‘원장차성귀(願將此聲歸) 폄피속이야(砭彼俗而野)’. 원컨대 이 폭포 소리를 세상으로 되돌려서, 저 속물스러운 것들에게 침을 놓아 가식 없는 사람으로 만들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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