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폭력을 다룬 누아르지만 15세 관람가 등급을 받았다. 폭력을 직접 묘사하기보다는 간접적으로 전달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이정재의 몫이 매우 컸다. 그는 “잔인함보다 화려함을 보여주고 싶었다. 직접적인 표현은 지양했다. 대신 그 시간에 표정으로 하겠다고 했다”며 웃었다.

■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냉혹 킬러 이정재

대사도 별로 없는 역할이라
의상·분장 등 비주얼로 표현
그 바탕에 표정·동작 덧입혀

영화 ‘헌트’로 감독에 도전도
예전부터 직접 써온 시나리오

“악역엔 상상력을 더 많이 집어넣을 수 있는 여지가 있어서 좋다.”

배우 이정재가 또 하나의 악역으로 돌아왔다. 5일 개봉하는 누아르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감독 홍원찬)를 통해서다. 피도 눈물도 없는, 그러나 패션모델처럼 근사한 스타일의 킬러 레이 역을 맡았다.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이정재를 만나 인터뷰했다. 그는 레이의 연기 신(Scene)에 관한 구체적인 질문이 들어올 때마다 반갑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1993년 ‘공룡선생’으로 드라마, 1994년 ‘젊은 남자’로 스크린에 데뷔한 이정재는 올해로 연기 경력 27년의 베테랑. ‘태양은 없다’(1998), ‘시월애’(2000), ‘오! 브라더스’(2003), ‘하녀’(2010) 등 수많은 주연작이 떠오르지만 최근엔 인상 깊은 악역이나 조연으로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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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2013)의 수양대군 역은 빼놓을 수 없는 캐릭터다. 영화가 한참 진행되다가 얼굴에 흉터가 있는 수양대군이 사냥복 차림으로 등장하는 대목은 극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최고의 하이라이트였다. “내가 왕이 될 상인가”라는 대사 역시 두고두고 패러디되고 있다. 이어 ‘암살’(2015)의 독립군 변절자 염석진, ‘신과 함께-죄와 벌’(2017)의 염라대왕 등은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이미지를 발산했다. 이번 작품에서도 이정재는 이전 캐릭터와 또 다른 독특함을 레이에게 부여하기 위해 고민을 거듭했다.

“기본적으로 킬러가 킬러를 추격하는 줄거리에서 레이가 왜 저렇게 인남(황정민)을 집요하게 쫓아가야 하느냐를 표현하고 싶었다. 관객들이 레이를 볼 때 ‘그냥 왠지 쟤는 그럴 것 같아’로 설명이 됐으면 했다. 그래서 레이의 전사(前史)에 대한 설명보다는 시각적인 것에서 리듬을 찾고자 했다. ‘묘함’을 살리고 싶었다.”

따라서 레이가 등장할 때마다 무게감이 남다르다. 올백의 헤어스타일, 목에 가득한 문신, 모델처럼 화려한 패션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인남에게 살해당한 형의 장례식장 장면에서 처음 등장할 때는 흰색 롱코트로 포인트를 주더니 그다음엔 파란색 정장, 호피무늬 셔츠 등으로 변주를 하는 게 그렇다.

“레이는 사실 대사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비주얼로 이해시키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제작진과 의상이나 분장 등을 협의했으나 저 나름대로 많이 고민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개인 스타일리스트를 합류시켰다.”

그다음엔 레이의 표정과 동작 하나하나를 도자기 빚듯 만들어갔다. 인남을 따라 태국으로 건너갔다가 현지 조직과 맞붙는 ‘차고지 액션’ 신에서 눈을 희번덕거리는 모습, 얼굴에 튄 피를 얼음으로 닦는 행동 등은 제작진과 수없이 머리를 맞대고 상의한 결과이다.

“원래 과도하게 표현하는 걸 안 좋아한다. 가만히 있어도 모든 게 드러날 수 있다면 좋다. 레이가 맹렬히 추격하는 이유는 형의 복수보다 그저 사냥감을 원하는 맹수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추격할 이유가 생기더라.”

이정재는 충무로에서 캐릭터 분석에 매우 철저한 배우로 통한다. 연기에 깐깐한 황정민도 “자기의 역할에 대해 이 정도로 집요하게 분석하는 연기자는 처음 봤다”고 할 정도다. 아마도 캐릭터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스타일 때문인 것 같다. 이정재는 캐릭터에 맞는 목소리 톤을 정하기 위해 미리 셀프 동영상을 찍어 확인한다. 현장에서 캐릭터와 관련한 아이디어도 많이 내는 편이다. 영화 속에서 레이가 시종일관 들고 다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그가 제안한 것이었다. 이런 섬세함 속에서 이정재의 레이는 개연성과 리얼리티를 확보했고 추격전은 물 흐르듯 질주했다.

따라서 이정재가 연출에 도전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 같다. 그는 ‘헌트’로 곧 메가폰을 잡는다. 데뷔 때부터의 파트너 정우성이 합류해 친구의 도전에 힘을 보탤 예정이다.

“‘헌트’는 예전부터 써온 시나리오다.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출에도 관심을 두게 됐다. 이 이야기는 내가 마무리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년에 찍을 예정이어서 (마무리에는) 시간이 좀 걸릴 듯하다.”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