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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울적한 날엔 종로통에 간다

기사입력 | 2020-07-31 14:45

김동률 서강대 교수·매체경영학

1가엔 클럽 코파카바나가 있다
과외로 번 돈 몽땅 갖다 바친 곳

2가엔 종로서적·고려당·‘반줄’
3·4가엔 서울극장·세운상가·종묘

종로통은 마르지 않는 추억의 샘
사연이 없는 길은 한계가 있다


걷고, 읽고, 쓰기가 요즘의 일과다. 코로나19가 한몫했다. 그중에서 걷기를 으뜸으로 친다. 그래서 무작정 걸을 때가 많다. 가끔은 자정에 서너 시간 도심을 걷기도 한다. 한밤에 나서는 나를 아내와 아이들은 이상한 사람이라고 놀린다. 하지만 난 안다. 깊은 밤 산책하기가 얼마나 매력적이라는 것을. 자정을 넘긴 야심한 시간, 취객들의 푸념조차도 연민을 느끼게 한다. 버스 전광판에는 ‘운행종료’ 빨간 글자가 반짝인다. 운행종료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내가 주로 걷는 곳은 서울 도심이다. 집 뒤가 북한산이지만 앞선 사람 엉덩이만 보며 헐떡이게 하는 산행은 별로다. 그래서 특별히 산행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을 경우 주로 도심을 걷는다. 나는 산티아고를 걷고 왔다는 사람들의 얘기는 무시해 버린다. 북한산 둘레길, 제주 올레길도 시큰둥하다. 사연이 없는 길은 한계가 있다. 정이 가질 않는다. 아, 물론 전적으로 내 생각이다.

그래도 서울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다. 가끔은 청계천을 걷기도 한다. 언젠가 수강생들을 광화문에서 만나 청계천 끝까지 걷고 강 건너 신사동 가로수길까지 가서 종강 파티를 한 적이 있다. 끝까지 걷지 않으면 참가를 못 하게 했다. 요즈음은 집 가까운 서촌과 청와대 주변을 걷는다. 주말에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작해 동대문까지, 종로통을 왕복한다. 종로통 걷기는 언제나 즐겁다. ‘어제는 비가 오는 종로거리를/ 우산도 안 받고 혼자 걸었네’ ‘종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어 보자/ 그 길에서 꿈을 꾸며 걸어가리라’는 노래도 있지 않은가.

사실 대한민국 종로통은 단순한 거리가 아니다. 베이비부머 세대에게 종로통은 추억의 기제가 된다. 우리 세대의 경우 대개 시골에서 자라 인근 대도시에서 중·고교를 다닌 뒤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다. 대학 시절에는 하숙이나 자취를 했으며 미팅이나 술자리는 주로 종로통에서 해결했다. 종로통에서 술을 마시다 당기면 2차로 신촌까지 원정을 갔다. 홍대 입구, 강남이 뜨기 전 얘기다. 그래서 종로통은 중·장년에게는 청춘의 한 시절 배경이 된다. 종로를 걸으면 온갖 생각이 다 난다.

1가에 ‘코파카바나’가 있었다. 대학 때 다녔던 클럽이다. 가난했던 80년대, 남미 브라질의 해변 이름을 붙인 클럽에 다니느라 과외로 번 돈을 몽땅 갖다 바쳤다. 얼마나 마음 졸이며 고팅 파트너를 기다렸던가. 2가에는 종로서적이 있었고, 인근에 고려당 빵집이 있었다. 마호가니 색깔의 투박한 그 집 나무의자가 또렷하게 생각난다. 고려당 단팥빵을 떠올리니 입안에 침이 돈다. 1학년 때 미팅에서 만난 여학생이 프란츠 파농의 책을 들고 와서 같이 공부하자고 나를 부추겼던 곳이다. 파농의 책들은 그 시대 운동권의 통과의례 같은 책이었다. 둘이서 파농을 핑계 삼아 자주 만났는데, 지금은 이름만 생각날 뿐 얼굴은 떠오르지 않는다.

2가 뒤편 골목에는 ‘반줄’이라는 최고급 레스토랑이 있었다. 물론 주머니 사정이 얄팍한 학생 신분으로는 출입이 어려웠다. ‘르네상스’라는 클래식 음악감상실도 서너 번 들락거렸다. 바그네리안으로 굳어지는 시절이었다. 짙은 초록 칠판에 백묵으로 레퍼토리를 써 주던 집이었다. 3가 쪽으로 넘어가면 서울극장이 지금도 힘겹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느 늦가을 ‘닥터 지바고’를 보고 언젠가 시베리아 설원을 가 봐야겠다고 맹세했다. 가난한 나라의 청년이 그런 꿈을 꾸던 그때는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몇 년 전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으로 꿈을 실현했다.

종로통 걷기의 하이라이트는 세운상가, 종묘, 탑골공원 일대다. 세운상가는 기성세대에게 보물과 같은 장소였다. 유하의 시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이 잘 대변해 준다. ‘학교를 저주하며 모든 금지된 것들을 열망하며, 나 이곳을 서성였다네/ 흠집 많은 중고 제품들의 거리에서 한없이 위안받았네/ 나 이미, 그때 돌이킬 수 없이 목이 쉰 야외 전축이었기에(중략)’라고. 실제로 세운상가는 그 시절 청춘들의 해방구 같은 곳이었다. 교과서 갈피에 숨겨 놓고 돌려 보던 빨간책, ‘블루라이트 요코하마’를 떼창으로 부를 수 있었던 것도 세운상가 덕이다.

탑골공원과 종묘 인근에는 노인이 많다. 대부분 초라한 행색이다. 강북에 사시는 가난한 노인들이 갖가지 이유로 모인다고 했다. 무료 급식도 있고, 박보장기도 있고, 조악한 물건들을 파는 길거리 좌판도 있다. 이 일대를 걸으면 ‘그때를 아십니까?’ 느낌이다. 이천원 하는 백반도, 안주 무제한 낱잔 소주도 있다. 커트 이발도 삼사천 원이다. 수년 전부터 나는 오천 원에 이발하고 있다. 요즘 올라 사천 원인데 거스름돈 천 원을 받지 않아 오천 원이다. 주변에서는 내가 어디 괜찮은 곳에서 이발하는 줄 알고 있다. 머리를 감으면 오백 원 더 내야 한다.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가 대접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종로4, 5가를 거치면 광장시장이 나온다. 코로나 이전에는 제법 사람들이 넘쳤다. 대형 약국이 즐비한 5, 6가를 죽 걷다가 다시 광화문 출발지로 돌아오는 종로통 산책은 나에게는 마르지 않는 추억의 샘이다. 종로통에는 묘한 냄새가 난다. 삶의 고단한 냄새다. 압구정동, 청담동, 강남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이 땅의 베이비부머 세대에게 종로통은 옛 기억을 일깨워주는 절대적인 오브제가 된다. 몇몇 자신만의 장소를 떠올리는 순간, 과거의 세계로 주유하게 되는 것이다. 금빛으로 빛나는 ‘기쁜 우리 젊은 날’로 돌아가 입가에 웃음을 띠기도 한다. 울적한 날에는 종로통에 가야 한다. 청춘의 날들이 지친 당신을 위무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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