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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재 지리학자, 경인교대 교수

인적 드문 섬에 사는 새, 퍼핀
55시간 배·비행기 타야 만나

청정바다 옆 깨끗한 곳 서식
‘거리두기’ 일찌감치 실천해와

‘코로나 블루’ 시달리는 여름
퍼핀 동영상 찾아보며 치유를

‘우울하신가요? 퍼핀 테라피(puffin therapy) 한번 받아 보세요.’ 스코틀랜드에서 퍼핀 포스터를 처음 봤다. 퍼핀은 도요목 바다오릿과의 새로, 멸종위기종이다. 알록달록한 부리에 짙은 눈화장을 한 것 같은 독특한 외모가 EBS 연습생 ‘펭수’와 많이 닮았다. 펍에서 만난 현지인은 취기가 오르자 ‘퍼핀을 직접 보면 매년 여름 이곳을 찾게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관광객을 늘리려 ‘네스호(湖) 괴물’의 전설을 지어낸 전력이 있는 영국인의 허풍이려니 했다.

한 달 넘게 독한 항생제를 먹어도 기침이 계속됐다. 스트레스성 질환이라며 의사는 휴식을 권했다. 망설이다가 몇 주 치 약을 챙겨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노르웨이로 향했다. 유서 깊은 바이킹의 도시에 도착하자 이틀 만에 기침이 멎는 기적이 일어났다. 19세기 영국의 의사들은 백약이 무효한 불치병 환자들에게 ‘신선한 바람을 쐬고 오는 여행’을 처방하곤 했다. 특히, ‘집안의 천사’로 갇혀 살며 꿈을 접어야 했던 똑똑한 여성들에게 효과가 좋았다고 한다.

내친김에 ‘퍼핀 테라피’까지 시도하기로 했다. 영국·노르웨이·아이슬란드 인근 북대서양은 퍼핀의 주요 서식지다. 하지만 퍼핀을 직접 본 노르웨이 사람은 드물었다. 퍼핀이 관광 상품화돼 있는 영국과는 달리 노르웨이에선 지도를 들고 야생의 퍼핀을 직접 찾아가야 했다. 퍼핀이 많이 산다는 노르웨이 북부 지방으로 무작정 길을 떠났다. ‘북극의 파리’라는 트롬쇠를 거쳐 스발바르 제도, 로포텐 제도까지 꼬박 55시간을 배와 비행기를 갈아타며 이동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노르웨이는 탐험가의 본능을 자극하는 땅이었다. 7월 한여름에도 산봉우리는 하얀 눈이 덮여 있었고, 해가 지지 않는 백야의 피오르는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섬들이 보석처럼 촘촘히 박힌 에메랄드빛 푸른 바다에는 간간이 고래가 나타나 물을 뿜었다. 퍼핀을 찾아가는 여정 자체가 환상적인 힐링 코스였다.

북해에서 유전이 발견되며 부국이 된 노르웨이지만, 20세기 초만 해도 매우 가난했다. 여름이 짧아 농사가 불가능해 먹거리가 늘 부족했다. 어업이 유일한 산업이었던 마을의 공동묘지에는 남자들의 무덤이 거의 없다. 거친 바다에 나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아버지를 대신하려면 어머니가 강해져야 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을 이겨내기 위해 서로 돕고 연대하며 천국을 일궈 왔다. 북유럽의 탄탄한 복지와 양성평등 문화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

수명이 30년이나 되는 퍼핀은 서식지를 까다롭게 고른다. 먹이를 구하기 좋은 청정한 바다를 끼고 있으면서 인적이 드문 섬이 둥지를 틀 최적지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일찌감치 실천해온 셈이다. 깨끗한 자연환경에 인구밀도가 낮은 곳을 찾아다니고 싱싱한 생선을 좋아하는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퍼핀과 공간적 취향이 정확히 일치한다. 실제로 하루키의 여행기, 아이슬란드 편에 퍼핀이 등장할 정도다. 퍼핀은 서식 환경이 나빠지면 몇 년간 피임을 하는 영물(靈物)이기도 하다. 최근 지구온난화로 북극해의 수온이 올라가자 개체 수가 급감했다. 먹이가 부족해지니 알을 낳지 않아서다.

비행기만 다섯 번을 갈아타고 퍼핀의 섬에 도착했다. 마침 퍼핀 축제가 한창이라 지역 주민들은 멀리서 퍼핀을 보러 온 손님을 더 반갑게 맞아주었다. 다정한 섬마을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으로 나는 ‘동물원의 퍼핀’이 된 듯했다. 드디어 진짜 퍼핀을 만나러 가는 아침. 높은 파도에 비까지 내렸다. 멀미약을 먹고 작은 보트에 올랐다. 2시간 넘게 바다를 헤매다 퍼핀 무리를 발견했다. 안개비를 뚫고 바다 위를 활주하는 퍼핀은 생각보다 작고 빨랐다. 윙윙거리며 날아가는 땅벌 전사 같기도 하고 어설픈 펭귄 같기도 했다. 작은 날개로 우스꽝스럽게 난다고 퍼핀을 무시할 순 없다. 깊게 잠수하려면 깃털이 많거나 큰 날개는 되레 방해가 된다. 잠수와 비행이 모두 가능하고 해수에 오래 떠 있을 수 있는 퍼핀이야말로 진정한 능력자 아닐까?

일부일처제에 충실한 퍼핀은 알도 1년에 딱 1개만 낳는다. 암수가 교대로 알을 품고 가사와 육아를 공평하게 나누는 양성평등 커플이기도 하다. 하루에 5∼6회 이상 섬과 바다를 오가며 싱싱한 생선을 부리에 가득 물고 와서 새끼에게 먹이는 정성이 지극하다. 예로부터 신혼부부에게 금실 좋게 살라는 의미로 원앙을 선물했다던데, 수컷의 30% 이상이 바람을 피운다는 원앙 대신 퍼핀 한 쌍을 건네면 어떨까?

이제 퍼핀 테라피의 하이라이트가 남았다. 퍼핀은 새끼를 품는 여름철에만 육지에 머문다. 섬에 착륙해 뒤뚱뒤뚱 오리처럼 걷는 퍼핀을 따라가면 아기 퍼핀까지 만날 수 있다. 평생 사람을 본 적이 없는 퍼핀은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퍼핀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평화가 깃든다. 근심·걱정·원망·슬픔이 사라지며 맑고 순수한 자연과 하나가 된다. 귀여운 퍼핀과 교감하다 보면 상처받은 마음이 저절로 치유된다.

유럽에서 퍼핀은 누구나 좋아하는 인기 스타다. 특히 어린이들이 퍼핀에게 열광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물자는 귀했고 아이들은 위안이 필요했다. 1940년대 펭귄북출판사는 퍼핀 동화책 시리즈를 출간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냈다. 최근 미국 IT 기업은 퍼핀 브라우저까지 개발했다. 아쉽게도 코로나19로 인해 당분간은 퍼핀을 찾아가는 ‘랜선 여행’에 만족해야 할 것 같다. 무더운 여름 코로나 우울증에 시달리는 독자들에게 퍼핀의 다양한 동영상을 찾아보는 ‘퍼핀 테라피’를 처방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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