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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靑, 북에 속았나 국민 속였나

기사입력 | 2020-06-29 11:37

이미숙 논설위원

김정은 核폐기 뭐라고 말했나
한미훈련 美결정 달렸다 했나
대북 정책用 트럼프 이용했나

볼턴 회고록 자세한 상황 묘사
매티스와 함께 同盟 위기 줄여
‘비핵화 쇼’ 진상 소상히 밝혀야


11·3 미국 대선을 4개월여 남겨둔 상태에서 출간된 존 볼턴 전 미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으로 전 세계가 난리다. 백악관은 볼턴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가고 있지만, 그의 회고록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엉망진창 외교 실상을 가감 없이 보여 준다. 특히 싱가포르 회담과 하노이 회담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해 북핵과 동맹 문제를 둘러싼 남·북·미 협의가 어떻게 전개됐는지 보여준다. 볼턴이 정상대화나 외교협의 과정을 공개한 것은 신뢰관계를 깨는 행위라는 청와대의 비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회고록은 의외의 효과를 가져올 것 같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다시는 2018년과 같은 동맹 자해 쇼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반성의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볼턴은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장관처럼 한·미 동맹을 위기에서 구해낸 은인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4·27 판문점 회담과 6·12 싱가포르 회담의 대전제가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였다는 것은 상식이다. 2018년 3월 특사 방북 후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북측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다”고 발표했다. 백악관 방문 때엔 “김정은은 트럼프 대통령과 회동하기를 원하며 비핵화 의지를 갖고 있고 한·미 군사훈련 지속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김정은의 행동은 달랐다. 싱가포르에서는 선(先)미·북 관계 정상화를 원했고, 하노이에선 영변 핵 시설 폐기와 유엔 제재 해제를 맞바꾸자고 요구해 결국 결렬됐다. 문 정부 주변 학자들은 북한이 ‘핵 대신 경제’라는 전략적 결단을 했다고 바람을 잡았지만,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는 기존의 북한 입장에서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정 실장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했거나, 북한이 비핵화 디테일에 어두운 통상전문 외교 관료인 그를 속였을 수도 있다. 정 실장은 향후 협상을 위해서라도 진실을 밝혀야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한·미 훈련 중단이다. 정 실장의 발표와 달리 김정은은 판문점 회담 때부터 한·미 훈련 중단을 밀어붙인 것으로 볼턴 회고록에 나온다. 싱가포르 회담 때 김정은은 “문 대통령에게 군사훈련 문제를 제기했더니 오로지 미국의 결정에 달렸다고 하더라”며 훈련 축소를 요구했다. 문 대통령이 판문점에서 그런 질문을 받았다면 “이미 양해한 것 아니냐. 한·미 훈련은 동맹 차원의 방어적 훈련”이라고 했어야 했다. 그러지 않고 김정은식으로 얘기했다면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니라 북한 변호인처럼 행동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 기자회견 때 한·미 훈련 중단을 발표한 것은 문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귀띔해준 결과로 비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청와대는 입장을 밝혀야 한다.

실무 협상 없이 이뤄지는 톱다운식 미·북 정상 회담에 대해선 백악관이 일관되게 반대했다. 익명의 백악관 당국자가 쓴 ‘경고(Warning)’에도 “김정은의 회담 제안을 수락한 것은 바보 같은 결정”이라고 지적됐다. “문 정부가 통일 어젠다를 위해 트럼프 대통령을 이용했다”는 볼턴의 비판과 같은 맥락이다. 다행히 하노이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영변만으론 부족하다”며 합의를 거부해 북한의 가짜 비핵화 쇼도 여기서 브레이크가 걸렸다. 볼턴은 1986년 레이캬비크 미·소 회담 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회담장을 박차고 나오는 비디오를 회담 전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여줬다는데, 그 덕분에 동맹이 산 것이다. 그대로 직진했다면 한국은 북핵이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미군 철수와 동맹 해체를 감내해야 할 상황을 맞을 뻔했다.

볼턴에 앞서 매티스는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파기 서신을 문 대통령에게 보내려 할 때 몸을 던져 막았다. 밥 우드워드의 ‘공포(Fear)’에 기록된 대로 이 위기는 문 정부가 알지 못한 상태에서 발생해 매티스가 내부적으로 해결했다. 반면 이번 위기는 문 정부가 자초한 것을 볼턴의 폭로 덕분에 조정 기회를 얻게 된 것으로 봐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좌충우돌 쇼에 집착하는 위험한 인물이지만 매티스와 볼턴 같은 이들이 있어 동맹은 위기를 넘기게 된 것이다. 한국엔 두 번의 행운이 연속된 셈인데, 행운의 여신이 늘 미소를 보내진 않을 것이다. 문 대통령은 2년 남짓 남은 임기를 또다시 가짜 비핵화 쇼에 올인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다간 동맹 보호막도 없이 핵 위협에 노출되는 진짜 위기를 맞게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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