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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미 서울예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남학생들 폭력 현장 보면서도
주변 어른들은 애써 모른 척

한겨울 반팔 티셔츠 입은 소년
도움 못 주고 안타까워 하기만

여행가방에 갇혀 숨진 아이
최소한의 안전 비상벨 없었다

미용실에 가다가 멈칫 걸음을 멈췄다. 상가 근처에 남학생들이 모여 있는데, 그중에 몸이 날렵해 뵈는 애가 때릴 것처럼 손을 쳐들자 다른 애가 굽실 몸을 조아린다. 어울려 노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손을 쳐들자마자 덩치 큰 애가 실내화 쥔 두 손을 공손히 모으며 고개를 수그렸고, 다른 애들은 순간 잠자코 돌아섰다.

그들 사이에 그런 상황이 처음은 아닌 듯했다. 한발 다가서는 것만으로도 덩치 큰 애를 움찔 물러서게 할 수 있는 위력의 아이. 작은 체구라도 걔는 강자였다.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위협하는 행동이며 고개 비틀고 침을 뱉는 모양이 영화에서나 볼 법한 바로 그 장면이다. 구체적 폭력도 큰소리도 나지 않았으나 즉각적인 반응으로 보건대 위력에 의한 서열 관계는 이미 형성돼 있음이 분명했다. 다른 애들은 주변에서 슬슬 움직였고 어떤 애는 좀 떨어져 담배에 불을 붙인다.

못 본 척하는 건 주변 애들만이 아니었다. 세탁소 남자는 시선을 돌린 채 담배만 피우고, 어떤 노인은 눈길도 주지 않고 걔들 옆을 지나간다. 마트 사장은 대여섯 걸음 지척에서 빈 상자만 정리하고, 정육점 남자는 걔들이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통화만 한다. 출입문 관리자는 유리창을 열어놓고 차단기만 올렸다 내렸다 한다.

이 요상한 장면이 한눈에 다 잡히다니….

길 건너편에서 중학생이나 됐을까 싶은 걔들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 걱정되고 궁금하기도 했다. 저보다 몸집이 작은 애 앞에서 굴욕당하는 덩치 큰 애가 한심하기도 하고, 저보다 큰 애를 위압으로 휘어잡는 작은 애가 밉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모르는 척 지나가기엔 타이밍을 놓쳤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태가 나빠지면 “왜들 그러니?” 하고 말하며 끼어들어야 하나 갈등 되는 이 상황. 사실은 그럴 자신도 없고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일탈 상황에 어른다워야 한다는 구시대적 요구만 있을 뿐 달라진 시대에 필요한 매뉴얼을 우리는 배운 바가 없다. 나중에는 어른답지 못했다는 막연한 죄의식마저 갖는다.

위협적인 순간 분명하게 든 생각은 있었다. 폭력 조짐이 보였을 때 주변에 있는 모두가 걔들을 일제히 쳐다봐 주었더라면! ‘우리가 지금 너희를 똑바로 지켜보고 있다’는 무언의 메시지만이라도 줄 수 있었다면! 무관심. 내가 본 것이 ‘아무 일도 안 벌어졌잖아’라든가 ‘세상에는 그보다 심각한 일이 차고 넘쳤다’는 반응으로 가벼이 넘길 일일까. 나는 그날 충분히 나쁜 일이 내재된 징조를 보았다고 확신한다.

사실, 이날 걸음이 멎은 까닭은 따로 있었다. 부채감으로 남은, 어느 날의 일 때문이었다. 두 해 전이다. 그날은 겨울치고도 참 인정머리 없게 추운 날이라, 광화문역의 사람들은 지하철이 몰고 오는 바람마저 피하며 귀가를 서두르고 있었다. 외투도 없이 서 있는 청소년을 거기서 보았다. 얄팍한 흰색 반 팔 티셔츠가 웃옷의 전부였다. 이런 날 도시 한복판에 외투도 없이 나올 리가 없는데. 일종의 폭력이 감지됐다.

똑바로 보기를 꺼리면서도 주변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걔를 신경 쓰는 눈치였다. 나는 가방 속의 머플러를 만지작거리며 걔를 몇 차례 돌아보았다. 한 번은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하지만 용기가 부족했다. 여성 머플러를 주면 받기나 할까, 무슨 일인지 물으면 화내지나 않을까, ‘1388’에 신고를 해야 하나, 가까운 의류 매장에라도 데려가고 싶은데….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데 정작 눈이 마주친 소년은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표시를 온몸으로 내고 있었다. 만면에 미소까지 띠면서. 그리고 마침 그때 플랫폼으로 들어온 전철을 타고 사라졌다.

그 애가 떠나고 나서야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내가 부끄러웠다. 재고 또 재면서 내 입장만 생각한 게 무서웠다. 나 같은 사람이 이기적이고 무관심한 거지. 소년의 표정대로 별일 아니었을 거라고도 생각해 보고, 정말로 진짜로 동정 따위 받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 추운 날 얇은 티셔츠 차림으로 도시 한복판에 있어야 할 상황이란 폭력 외에는 설명이 안 된다. 만면에 미소까지 띠고 ‘나 괜찮아’를 연기하는 내면에 얼마나 절박한 자존감이 버티고 있었던 것인가. 그 애는 타인 속에서 기를 쓰고 자기를 지켜내고자 했던 거다. 그 얘기를 들은 남편이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데, 나는 그 표정의 답을 알고 있었다. 어쭙잖은 위로라도 하는 사람이 그런 표정일 때는 나를 진심으로 책망하는 거다.

두고두고 빚진 기분이었다. 그때 그 누구였더라도 나처럼 갈등했을 것이다. 그 소년이 굴욕적이지 않게 도울 방법을 우리가 좀 알았더라면. 우리 대부분은 용감하지 못하다. 나처럼 소심한 사람들이 조용히 비상벨을 누르면 역무실에서 전문가가 나와 소년을 다만 따뜻한 곳으로 데려가 몸을 감싸주고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안전지대 같은 매뉴얼이 마련될 수는 없나.

일이 크게 터져야 모두가 알게 되는 아이들 사건. 뉴스는 경쟁적으로 어떤 처벌을 내려야 하는지에 각을 세우고, 익명의 댓글들은 사건 못지않게 자극적으로 달리며, 외면했던 사람들은 그제야 선하디선한 입장을 보인다. 일이 벌어진 뒤의 반성은 너무 늦으니 아이들에 대한 위험 사안들은 늘 체크 가능한 안전지대 안에 두어야 한다.

짐도 아니건만 여행 가방에 7시간 넘게 갇혀 23㎏의 몸으로 목숨을 잃은 아홉 살 아이 사건으로 지금 우리 사회가 몹시 침통하다. 이 지경이 되도록 전조 증상이 없었겠나. 모두 용감하기를 바라는 건 무리다. 우리에게는 최소한 소심한 사람들을 위한 비상벨이라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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