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가 다녀온 2019 여행지 ‘Top 5’

이제 또 한 해의 끝에 섰습니다.
삶을 여행에 비유한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여행을 하고 있으며
어디쯤을 지나고 있는 것일까요.
올해 ‘LIFE & 여행’은 다양한 곳들을 찾아다녔습니다.
때로는 위안이기도 했고, 평화이기도 했고,
감동이기도 했습니다.
아쉬움 혹은 낭패로 남은 여행도 있었습니다.
남북 화해의 훈풍 속에서 반목과 증오의 공간에 놓인
‘DMZ 평화의 길’을 세 번에 걸쳐 두근거림으로 걸었지만,
이제 길은 문이 닫혔고,
언제 다시 열릴지도 기약이 없습니다.
길이 닫힌 건 아프리카돼지열병의
확산 우려 때문이었지만,
길이 열릴 때의 희망과 기대는
이제 꺼져가는 불씨로만 남았습니다.
전남 여수에서는 무료한 시간이 주는 즐거움을,
신안의 작은 섬에 들어선 열두 개 예배당에서는
기도의 평화로움을 느꼈습니다.
경남 남해 금산에서는 전설에 새겨진
은유와 상징 혹은 상상력을,
진한 단풍으로 물든 지리산에서는
길을 안내하며 더 행복해진 이의 삶을 생각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그간 다녀왔던 곳들을 꺼내 놓아 보시지요.
그리고 가장 좋았던 여행을 꼽아 보시지요.
여행은 때로 삶을 축약합니다.
우리는 어디를 건너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여행의 즐거움은 목적지가 아니라
그곳으로 가는 과정 속에 있음을,
세밑에 다시 생각합니다.

이미지 크게보기 지난해 놓인 ‘DMZ 평화의 길’ 중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고성 구간에서 금단의 경계로 들어선 탐방객들이 멀리 금강산 채하봉과 진청색 바다를 넋을 놓고 오래 바라보고 있다. DMZ 평화의 길의 세 개 구간 모두 아프리카돼지열병 확산 우려로 운영이 전면 중단됐다.

갈 수 없어서 더 그리운… 평화로 가는 길
#1 DMZ 평화의 길

한 해를 돌아보면서 아쉬움으로 뒤돌아보게 되는 곳이 ‘DMZ 평화의 길’이다. 팽팽한 긴장과 경계의 땅 비무장지대(DMZ). 남북 화해로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면서 지난해 세 곳의 DMZ에 평화를 염원하는 길이 열렸고, 그 길에 모두 동행했다. DMZ 평화의 길 첫 개방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건, 닫힌 문 너머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감격, 그리고 당위나 의무감 때문이기도 했다.

강원 고성의 최전방 접적 지역에 놓인 첫 번째 DMZ 평화의 길은 4·27 남북정상회담 1주년을 맞은 4월 27일 일반에 공개됐다. 이른 새벽 전방지구 산자락에 봄을 시샘하는 늦은 진눈깨비가 흩날리다 그친 날이었다. 무음(無音)과 정물(靜物)로 이뤄진 ‘진공의 공간’처럼 느껴지는 그 길은 바다와 어우러져 비경을 이뤘다. DMZ 평화의 길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길이었다.

지난 6월 개방한 두 번째 DMZ 평화의 길은 강원 철원의 ‘진짜 DMZ’에 놓였다. 세 코스 모두 ‘DMZ’의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다른 구간은 추진철책선 바깥의 일반전초(GOP)까지만 간다. 그러나 철원 구간은 백마고지전적지에서 출발해 무장 병력의 경호를 받으며 팽팽한 긴장 속에서 ‘진짜 DMZ’ 안 감시초소(GP)까지 들어간다. 북한 초소가 코앞인 GP를 민간인에게 상시 공개하는 것은 ‘분단 이후 최초’의 일. 긴장감에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그리고 지난 8월 고성과 철원에 이어 DMZ 평화의 길 ‘파주구간’이 문을 열었다. 파주구간의 최종 목적지는 ‘철거한’ GP다. 남북한 적대행위 금지 약속으로 초소는 철거됐고 빈 공간만 남았다. 공간은 때로 ‘사라져서’ 의미를 갖기도 한다. 파주구간을 걷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파주구간을 개방하는 첫날에 북한이 신형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했기 때문이었다. DMZ 평화의 길은 지난 9월부터 차례로 닫혔다. 아프리카돼지열병 확산 우려 때문이지만, 비핵화 협상의 난항 등으로 언제 다시 길이 열릴지는 불투명하다. 평화의 길은 여러 사람의 겹쳐진 발자국으로 또렷한 길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DMZ는 또다시 적의로 가득한 금단의 땅이 될 것인가.

이미지 크게보기 진초록 파래로 뒤덮인 전남 여수 하화도 해안에서 상화도 쪽을 바라본 모습. 하화도는 다양한 매력의 트레킹 코스가, 상화도는 고즈넉한 섬마을의 정취가 돋보이는 곳이었다.

二色 코스, 이색 매력… 꽃 같은 두 섬에 반하다
#2 전남 여수 상화·하화도

지난봄에 전남 여수의 앞바다에 꽃잎처럼 떠 있는 두 개의 ‘꽃섬’을 찾았다. 웃꽃섬(상화도·上花島)과 아래꽃섬(하화도·下花島). 그곳에서 가장 반짝이는 봄날과 만났지만, 그것보다 더 아름다웠던 것은 섬에서 만난 것들이 품은 이야기였다.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상화도와 하화도는 배로 10분 거리가 채 안 된다. 두 섬의 분위기나 매력은 전혀 달랐다. 걷기 코스의 경관과 코스는 하화도가, 고즈넉한 섬의 정취는 상화도가 뛰어났다. 두 섬은 보아야 할 것도, 느껴야 할 것도, 시간을 보내는 방법까지도 사뭇 달랐다. 배 시간을 고려한 여행의 순서는 오전에 상화도에서 시작해 오후에 하화도로 건너가는 것.

상화도에는 배 시간 때문에 4시간 30분 정도 머물게 되는데, 사실 2시간이면 섬을 다 돌아보니, 2시간 30분이 남는다. 어쩌면 무료하기까지 한 이런 시간이 바로 상화도 여행의 가장 큰 매력이다. 쑥 캐는 할머니와 이야기 나누기, 섬마을 골목 기웃거리기, 귀목나무 당산 아래서 바다 바라보기,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 벤치에 앉아 있기…. 상화도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며 한 일이다.

하화도는 섬트레킹 명소로 제법 이름났다. 스물다섯 가구가 사는 섬에 언젠가는 주말 이틀 동안 자그마치 1500명이 넘는 관광객이 섬에 들어왔던 적도 있었다고 했다. 하화도는 다채로운 섬의 풍경을 모두 다 갖고 있다. 바다를 배경으로 초록의 초지가 펼쳐지는 이국적인 경관도 있고, 초록이 짙은 오솔길과 가파른 해안 벼랑으로 이어지는 해안 길도 있다. 바다 가까이 내려서서 거친 지형의 박력 있는 해안 풍경을 감상하는 구간도 있다. 덕분에 하화도에서는 몸도 마음도 바쁘다.

이미지 크게보기 경남 남해의 두모마을 쪽에서 금산에 올라 내려다본 풍경. 이쪽으로 오르는 탐방로에는 불로초를 찾으러 온 서복의 글씨로 전해지는 양아리 석각이 있었다.

불로초보다 값진 서복의 전설에 담긴 은유
#3 경남 남해 ‘금산’

여행에서 만나게 되는 건 풍경뿐만이 아니다. 때로는 역사와 전설, 상징과 은유와 만나기도 한다. 지난 늦봄 경남 남해의 금산(錦山)에서 ‘서복(徐福·또는 서불)’과 만났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진시황의 명령으로 죽지 않는 약, 그러니까 ‘불사약’을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 3000명을 이끌고 동쪽으로 갔다는 서복이 등장한다. 2200년 전의 인물. 그가 남해까지 왔다. 서복의 전설이야 제주에도, 거제에도 있지만 남해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하다.

남해 금산 등산로 중간쯤에 거북 형상 바위 ‘양아리 석각’이 있다. 양아리는 마을 지명이고, 석각은 ‘돌에 새긴 글씨’를 말한다. 글씨는 해독되지 않았다. 거란족의 글씨라는 설도 있고, 수렵의 모습을 새긴 그림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고대문자라거나 별자리를 표시한 것이란 얘기도 있다. 이 글씨가 바로 불사약을 구하러 동쪽으로 떠난 서복이 남긴 글씨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양아리 석각이 서복의 글씨가 맞고, 남해 금산에 서복이 온 게 맞다면, 그는 과연 불사약을 찾았을까. 이런 질문에 남해의 향토학자들이 내민 색다른 해석이 있다. 서복이 찾아 헤맨 불사약이란 불로초가 아니라 ‘도교적 이상세계에 대한 은유’로 해독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서복이 찾은 불사약이 ‘별’이었다는 뜻밖의 답을 내놓는다. 지구와 313억 광년 거리에 있다는 별 노인성.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 ‘목숨별(수성·壽星)’이라고 부르는 이 별은 태양보다 65배나 큰 별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남쪽의 해안가에서 춘분이나 추분 때가 아니면 볼 수 없다. 노인성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고 여겨졌다. 옛사람들은 이 별을 세 번 보면 무병장수하고, 아홉 번 보면 구천에서 태어난다고 믿었다.

이미지 크게보기 전남 신안의 기점·소악도를 돌아보는 ‘기적의 순례길’ 위에는 열두 개의 작은 예배당이 세워졌다. 여객선이 닿는 대기점도 선착장 위의 첫 번째 예배당 ‘베드로의 집’.

지친 삶에 위로 안겨주는 ‘작은 순례길’
#4 전남 기점·소악도

전남 신안의 병풍도가 거느린 새끼 섬인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 노둣길로 이어지는 이 작은 섬 네 곳을 한꺼번에 일러 ‘기점·소악도’라고 부른다. 지난 10월 기점·소악도에 조성 중이던 ‘기적의 순례길’을 찾아갔다. 섬과 섬을 잇는 노둣길이 물때에 따라 하루 두 번 썰물 때만 드러나니 ‘기적’이고, 그 섬을 잇는 길에다 예수의 12사도 이름을 딴 작은 예배당 열두 곳을 짓기로 했으니 바로 ‘순례길’이다.

기적의 순례길이 채 완성도 되기 전에 조바심을 이기지 못하고 다녀왔는데, 그 덕에 전 세계에서 온 예술가들이 섬에서 먹고 자며 예배당을 기도처럼 짓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예배당은 작다. 모두 두 평 미만이다. 겨우 한 평이 될까 말까 한 곳도 있다. 한 명이, 혹은 두어 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정도의 크기다. 예배당은 작아서 특별하다. 무엇보다, 작은 예배당은 온전한 ‘혼자의 공간’을 만들어준다. 섬을 순례하듯 걸으면서 저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 예배당은 모두 열두 개를 짓는데, 그곳을 찾았을 때는 열 개의 예배당만 볼 수 있었다. 여섯 번째와 여덟 번째 예배당은 착공도 시작하기 전이었다. 노둣길 위에 세우는 여덟 번째 예배당 ‘마테오의 집’은 이제야 마무리 작업 중이고, 저수지의 물 위에 짓는 여섯 번째 예배당 ‘바르톨로메오의 집’은 아직도 공사가 한창이다. 바르톨로메오의 집은 섬 안의 저수지 물을 빼고 예배당을 지은 뒤에 물을 다시 채워 열두 개 예배당 중 유일하게 출입할 수 없는 예배당으로 짓고 있다. 열두 개의 예배당과 그 예배당을 잇는 길은, 작은 섬을 순례처럼 걸으면서 때로 기도하는 길이다. 삶에 지치거나 위안이 필요한 이들에게 권한다.

이미지 크게보기 지난가을 단풍은 유독 색이 짙었다. 지리산 단풍은 더 아름다웠다. 지리산 피아골의 최고 단풍 명소 ‘삼홍소’에서 절정을 맞은 단풍을 즐기는 탐방객들.

불꽃같은 가을단풍, 봄꽃보다 화려하구나
#5 전남 구례 지리산

지난가을 지리산의 단풍은 유독 아름다웠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가장 곱고 진한 색감이었다. 지리산 단풍의 하이라이트는 뱀사골과 피아골이다. 단풍의 지리산 남하는 예년보다 열흘 정도 늦었으나, 피아골에 당도한 단풍은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색이 짙었다.

500년 전쯤 지리산 피아골 단풍에 취한 선비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남명 조식이다. 그가 피아골에서 남긴 시 한 수. “흰 구름 맑은 내는 골골이 잠겼는데／가을의 붉은 단풍 봄꽃보다 고와라／천공(天公)이 나를 향해 뫼(山)빛을 꾸미시니／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조차 붉어라.”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피아골의 최고 단풍명소 ‘삼홍소(三紅沼)’의 이름이 유래했다. 산과 물과 사람 모두가 붉어 삼홍(三紅)을 이뤘다는 뜻이다.

발길은 지리산 단풍을 찾아갔지만, 실상 지리산에서 얘기하고 싶었던 건 지리산게스트하우스다. 전남 구례군 산동면 지리산 아래에 있는 지리산게스트하우스는 단순한 숙소의 의미 이상이다.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은행가 출신 정영혁(57) 씨는 은퇴 후 여기 지리산 아래 정착했다. 지리산 종주를 열 번 넘게 해본 이와 지리산이 처음인 이에게 각각 추천해줄 코스를 모두 알고 있다는 얘기다.

지리산에 처음 발을 디딘다면 지리산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가시길…. 가을 단풍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체력은 어느 정도고, 등산 경력은 얼마나 되는지를 넘어서, 대화 속에서 여행의 이유와 지리산을 가겠다는 열망의 무게까지 잰 후에 지리산게스트하우스 정 씨의 ‘지리산 처방전’이 나온다. 체력과 열망이 저마다 다른 만큼 사람마다 받아드는 처방전도 다르다.

글·사진 =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