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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종 논설위원

드라마 ‘모래시계’의 모티브가 된 ‘슬롯머신 사건’(1993년)은 비주류 검사인 홍준표와 언론이 없었다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사건으로 6공의 황태자로 불린 박철언 전 의원을 비롯해 경찰청장, 치안감, 병무청장, 고등검사장 3명 등 40여 명의 고위공직자가 연루돼 사법 처리를 받았다. 대검 중수부도 아닌 조폭을 단속하던 서울지검 강력부 검사 몇 명이 권력형 부패를 단죄할 수 있었던 것은 공교롭게도 ‘피의사실 공표’ 덕이 컸다.

당시 경북고-서울대 법대 인맥이 검찰의 주류였던 시절, 스스로 ‘잡어’에 비유했던 이단아 홍준표 검사의 결기와 언론의 적극적 보도가 그런 결과를 이뤄냈다. 엄청난 수사 외압에 직면한 홍 검사는 수사 내용을 언론에 흘리는 방법으로 혐의를 기정사실화하면서 여론의 힘으로 버텨냈다. 그 사건이 아니더라도 검찰이 권력을 겨냥한 수사를 할 때 외압을 이겨내는 방식으로 언론의 ‘협조 아닌 협조’에 의지했다. 그러나 형법 제126조 피의사실 공표죄는 공판 청구(기소) 전에 검찰 등이 공표한 경우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하도록 할 만큼 엄격하다. 피의자의 확정되지 않은 범죄 사실을 미리 흘려 ‘인격 살인’의 선입견을 갖게 하는 부작용도 있다. 그러나 고위공직자 범죄나 흉악범의 경우, 국민의 알 권리가 더 존중돼야 한다는 여론이 앞서면서 실제로 처벌된 적은 없다.

그런데 정부와 여당이 18일 조국 일가 수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형사사건 공개금지 규정’을 만들겠다고 한다. 이 규정에 따르면 그동안 유명인사의 경우 해 왔던 ‘포토라인’도 본인의 동의가 없으면 못 하고, 기자와 티타임 형식으로 해 왔던 중간 브리핑도 원천 금지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수사 당시 특검이나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에 박수 치던 여당이 조 장관 사건을 계기로는 “명백한 범죄행위”라며 강력히 반발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조 장관도 지난 2011년 5월 은진수 당시 감사원 감사위원이 한 로비스트로부터 금품을 받았다는 보도와 관련, SNS에 ‘피의사실공표도 정당한 언론의 자유 범위 안에 있으면 위법성이 조각돼 불벌(不罰)’이라는 글을 남긴 바 있다. 자신과 일가의 수사가 한창 진행될 때 규정을 개정하겠다니 ‘오얏나무 밑에서 갓끈 고쳐 매지 말라’는 속담이나 돌아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