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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심·추진력서 혁신·소통으로… 한국형 ‘오너 리더십’ 진화하다

임대환 기자 | 2019-09-17 11:32


■ 5대 기업 경영철학 어떻게 바뀌었나

삼성
이병철 ‘이 길이 맞는다’ 결단
이건희 ‘모든 걸 바꿔라’ 선언
이재용은 ‘초격차 혁신’ 시동

현대차
정주영 ‘불도저 리더십’ 이어
정몽구, 공격 마케팅 ‘역발상’
정의선, 미래차로 ‘게임체인저’

SK
최종현, 기업 사회적책임 강조
최태원 ‘가치 경영’으로 계승

LG
창업 구인회 ‘인화경영’ 철학
구광모, 순혈타파 ‘변화’ 접목

롯데
신격호 ‘신용·성실’ 회사 키워
신동빈, 직원들과 적극적 소통

“제가 한국 경제와 정주영 회장님을 뵙고 깨닫게 된 것은 경영은 학식과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기업가 정신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과 기질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많은 불확실성과 위험요소, 난관으로 가려진 미래의 사업 기회를 날카로운 예지력으로 간파해내고 이를 강력하게 밀고 나가는 리더십과 결행력을 가진 정 회장님은 이론 이전에 선천적으로 타고난 분입니다. 저는 한낱 이론가일 뿐이죠.”

세계적인 석학이었던 피터 드러커 교수가 한국을 찾았던 1977년 10월. 그는 한국에서 꼭 만나고 싶은 사람으로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을 꼽았다고 한다. 그가 정 회장을 만나 했던 대화는 당시 한국 경제를 이끌어 갔던 경영인들의 리더십을 잘 표현해 주는 말로 전해지고 있다.

삼성과 LG, 현대, SK, 롯데 등 한국 경제를 이끌고 있는 주요 대기업 창업주들은 ‘불도저’와 ‘뚝심’으로 대표되는 리더십을 공통으로 갖고 있었다. 국가 경제의 틀을 다잡아 나가던 시절, 그들에게는 불도저 같은 강한 추진력과 뚝심, ‘이 길이 올바른 방향’이라는 선구자적인 리더십이 충만해 있었다.

창업 1·2세대에서 3·4세대 오너로 이어지고 있는 현재, 재계 리더십은 추진력과 뚝심보다는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초격차 경영’이나 ‘사회적 가치’ ‘소통 경영’ 등의 리더십이 더 강조되고 있다.


◇‘불도저·뚝심’의 1·2세대 리더십 = 국내 주요 그룹 창업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리더십을 발휘한 사람은 바로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다. 그의 일대기를 다룬 저서 ‘이봐, 해 봤어?’라는 책 제목은 그의 불도저 같은 리더십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말이다. 스웨덴 폐유조선을 가라앉히는 방식으로 공사 기간을 36개월이나 단축한 충남 서산 간척지 물막이 공사는 정 명예회장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야기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2000년대 현대·기아자동차의 급성장 중심에는 정 명예회장을 계승한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강력한 리더십이 있었다. 적극적 현장 경영과 과감하고 신속한 의사결정, 위기에 더욱 공격적으로 맞서는 역발상 경영 등으로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을 선보였다. 취임 후 사업장 점검차 미국을 찾은 정 회장은 한국 근로자들이 열심히 만든 차들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당시 현대차는 품질이 뒤떨어져 현지에서 리콜 요청이 쇄도하고 있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은 미국에서의 공격적 마케팅은 정 회장의 역발상 리더십을 잘 보여준다. ‘2년-2만4000마일 보증’이 일반적이던 1999년, 현대차는 자동차 본고장 미국에서 ‘10년-10만 마일 보증’을 내세워 미국의 자동차 시장을 깜짝 놀라게 했다.

삼성과 LG 창업주와 1세대 오너들의 리더십 역시 미래를 내다보는 넓은 식견과 흔들림 없는 돌파력이 요체였다.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선대회장은 1983년 ‘도쿄(東京) 구상’을 통해 반도체 산업 진출을 선언했다. 이미 미국과 일본이 세계 반도체 시장을 선점한 상황에서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길이 맞는다’는 뚝심으로 오히려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 결단이었다. 이 선대회장의 결단은 지금의 글로벌 1위 삼성전자를 만들어 낸 주춧돌이다.

선대회장이 과감한 투자로 새로운 사업에 진출했다면, 혁신을 통해 이를 글로벌 궤도에 올려놓은 것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다. 이 회장은 부친의 뒤를 이어 삼성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신경영 선언’을 통해 과감한 혁신을 단행했다. 이 회장이 1993년 진행한 독일 프랑크푸르트 사장단 회의는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우리 경영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말로 남아 있다. 이후 이 회장은 기술 혁신에 박차를 가해 2위와의 격차를 더 벌려 놓는다는 개념의 ‘초격차’를 제시, 글로벌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LG그룹 창업주와 1세대 리더십은 ‘인화(人和)’ ‘서로 믿고, 이해하면 불가능은 없다’는 경영철학이 모태다. 창업주인 고 구인회 회장은 생전 경영원칙으로 인화, 신용과 기술 중시, 사회·문화적 책임 등 이른바 ‘연암정신’을 내세웠다.

이후 구자경 명예회장은 부친을 도와 LG를 함께 일궈온 1.5세대 경영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랜 공장생활을 통한 ‘현장 수업’을 거쳐 20여 년간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경영전략은 그의 대표적인 경영 리더십이다. 주력 사업인 화학과 전자부문 등 부품소재 사업까지 영역을 확대해 원천기술의 경쟁력을 확보, LG그룹의 수직계열화 모습을 갖출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

주요 대기업 창업세대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역시 빈손으로 현해탄(玄海灘)을 넘는 과감한 도전정신과 어떤 환경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뚝심으로 지금의 롯데그룹을 일궈냈다. 1942년 관부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과 우유배달 등으로 고학 생활을 하며 롯데그룹을 일으킨 신 명예회장의 리더십은 ‘신용과 성실’에서 비롯됐다. 일본인 독지가가 빌려준 당시 5만 엔으로 1944년 커팅 오일을 제조하는 공장을 차린 신 명예회장이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공장이 전소했음에도 다시 일어서 1년 반 만에 돈을 갚고 집 한 채까지 사 주었다는 이야기는 그의 신용과 성실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은 생전에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최 선대회장은 1995년 울산시와 울산대공원 조성을 위한 약정을 맺는 자리에서 “나는 기업 이익의 사회 환원이란 말을 싫어한다”며 “우리는 사회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빚을 지고 있으며, 기업의 이익은 처음부터 사회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0년 앞을 내다보는 경영과 인재경영을 통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깊은 철학을 담아 경영에 몰입했다. 특히 ‘장학퀴즈’에 대한 애착이 컸다.


◇‘융합 시대’ 3·4세대 리더십 = 현재 국내 대기업을 이끄는 오너 일가 후세대들은 창업주 세대와는 상당히 다른 리더십을 선보이고 있다. 산업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자동차와 정보통신기술(ICT), 유통과 ICT가 융합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아 이들의 리더십도 강력한 지도자의 모습보다는 환골탈태 수준의 ‘혁신’과 격의 없는 ‘소통’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또 기업에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분위기에 따라 사회적 가치 창출에도 오너들이 앞장서고 있다.

삼성가(家) 3세 이재용 부회장은 ‘초일류’를 향한 끊임없는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지난 4월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하며 메모리반도체를 넘어 차세대 먹거리인 시스템 반도체를 육성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5세대(G) 통신, 인공지능(AI) 등 4차 산업혁명 물결에서도 ‘초격차’에 시동을 걸고 있다. 이 부회장의 이런 혁신 리더십은 위기를 돌파하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그는 지난 7월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에 대응해 일본 현지로 날아갔고, ‘컨틴전시 플랜(비상계획)’ 가동을 선언하며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사업장을 찾아 위기관리에 직접 나섰다.

현대가 3세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현대자동차그룹의 환골탈태를 이끄는 ‘게임 체인저(Game Changer)’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는 자동차만 잘 만든다고 되는 게 아니라 ‘스마트 모빌리티 기업’으로 변신해야 미래 산업 흐름을 이끌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자동차 소유에서 공유로 바뀌는 추세에 대응하고, 친환경차와 자율주행차 등 미래차 기술 연구·개발(R&D) 및 개방형 혁신에 집중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는 새로운 리더십의 선봉에는 최태원 SK 회장이 있다. 최 회장은 지난 5월 기자간담회를 통해 관계사별로 창출한 사회적 가치를 금액으로 환산해 공개했다. 지난해 기준 SK이노베이션이 1조1610억 원, SK텔레콤이 1조6520억 원, SK하이닉스는 9조5197억 원에 달하는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냈다.

LG가의 젊은 4세 구광모 회장은 ‘인화’를 앞세우던 그룹 관행에 ‘변화’와 ‘혁신’을 과감히 접목했다. 구 회장은 실용주의를 앞세워 완전자율복장제, 월 1회 ‘팀장 없는 날’ 등을 통해 유연하고 자유로운 사내 문화를 조성했다. 보수적 ‘순혈주의’가 성장을 가로막는다고 판단, LG화학 대표이사(부회장)로 3M 출신 신학철 수석부회장을 영입하는 등 외부 인재를 적극 수혈했다.

현시대 대기업 오너 리더십의 또 하나 공통점은 소통이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형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과의 ‘형제분쟁’ 이후 적극적인 소통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지난 3월 신 회장이 롯데월드타워 지하 구내식당에 나타나 롯데지주 직원들과 즉석에서 셀카를 찍은 것은 보수적 분위기가 강했던 롯데그룹 문화에서는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신 회장은 이후로도 특별한 약속이 없을 때는 일반 직원들이 이용하는 구내식당을 찾는다. 정의선 부회장도 유연한 소통 리더십으로 조직문화 변신을 주도하고 있다. 정 부회장은 “직원들과 같이 논의하고 아이디어를 나눔으로써 속도는 느리더라도 함께 더 좋은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임대환·김성훈 기자 hwan91@munhwa.com

1983년 삼성반도체통신 기흥공장 건설현장을 점검하는 이병철(앞줄 왼쪽 세 번째) 삼성그룹 창업주. 삼성전자 제공 1985년 포니엑셀 신차발표회장을 찾은 정주영(맨 앞) 현대그룹 창업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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