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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수 고려대 명예교수·법학

궂은 비 온다고 불평하지 마라
먹구름 위는 언제나 푸르니까

필요 이상의 물질은 삶의 짐
비축함은 지혜 아닌 애물단지

나의 작은 것으로 남을 돕는 일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인가

삶보다 더 귀한 게 어디 있으랴. 광야에 흩어져 자라는 들풀 하나도 창조주가 보기에 소중하거늘 하물며 피조물의 세계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 인간의 삶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한 번 맡겨진 인생일진대 어디다 허투루 쓰고 낭비할 여지가 있겠는가. 이미 경제적으로 풍요한 사회에 진입했다는 데도 주위에서 왜 아직도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사는 분들을 자주 만날까. 어떤 이는 상대적인 박탈감이 더 크기 때문이라 말한다. 어떤 이는 소수의 가진 사람이 기회를 독점하고도 주위 사람들의 아픔을 모르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재수하는 자녀를 둔 많은 학부모는 요즘 누구 집안 때문에 치밀어 오르는 울화통을 견디기 힘들다고도 한다. 또 다른 이는 장래에 대한 희망의 불빛이 너무 멀고 희미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손을 붙잡고 한마디씩 물어본다면, 금방 한 짐 가득 볼멘소리를 거둬들일 수 있으리라.

좌절과 고통이 없는 인간의 삶은 진짜가 아니다. 세계 내에 존재하는 사물 모두 명암 두 면이 있듯이, 삶의 굽이굽이마다 그림자 없는 인생은 현실로 찾기 힘들다. 절망 가운데서 눈물골짜기를 지날 때라도 우리 낙심하지 말자. 세상은 둥글고 기회도 둥글다. 참고 가다 보면 나를 찾아 떠난 행복을 어디쯤에선가 꼭 만나게 될 것이다. 젊은 날에 들었던 ‘궂은비가 온다고 불평하지 말자, 먹구름 위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태양은 빛나니까’라는 독일 남부지방의 어느 민요 가사를 지금도 마음에 간직하고 산다. 요즘처럼 무더울 때는 또 만날 겨울 추위를 생각하며, 고마운 마음으로 오히려 더위를 즐기는 편이다. 추운 겨울 찬바람 속에서는 무덥던 여름을 생각하고 참아 견디며 즐기듯이 말이다.

하나님은 참 공평하신 분, 하나님은 진실로 공정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요즘 들어 날마다 새로워진다. 해방 그다음 해에 태어난 우리 세대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배고픔을 아는 세대라고 자부하고 싶다. 가난한 산골짜기 마을에서 유년기를 보낸 나는 절대빈곤이란 딱딱한 이 말이 아픔인 줄도 모르고 그저 웃음으로 받아넘기며 또 부드럽게 대하며 자랐다.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때로는 뙤약볕 속에서, 때로는 눈비도 맞으며, 매일 왕복 40리 길을 뛰기도 하면서 걸어 다녔다. 그 길을 걸으며 잠잠히 생각하던 것이 나중에 나의 산문이 되었고, 꿈꾸며 노래하던 것이 먼 훗날 나의 시가 될 줄이야! 대학생활에서 4년간의 치열한 고시 공부, 독일 유학생활에서 5년간의 학위 과정은 대체로 새벽 다섯 시부터 밤 열한 시까지 매일 공부와 씨름하는 삶이었다. 그 고독한 길을 견딜 수 있었던 힘은 아마도 어린 시절 소를 몰고 농사일을 돕느라 험한 재를 넘으며, 또 매일 왕복 40리 학교 길을 뛰고 걸으며 다진 훈련 아닌 훈련 덕분이었으리라.

대학 시절에 나는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았고, 그 길을 한결같이 걸어온 지 벌써 50년이 더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 겪은 큰 변화라면 내 생각이 단순해졌다는 사실이다. 한여름철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던 갖가지 젊은 꿈이 퍽 단순해진 것이다. 녹록지 않은 살림살이에 대학을 다닌다는 것은 당시엔 큰 모험 같아 보였던 때였다. 어느 날 새벽 성경을 읽다가 내 인격 전체를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말씀을 만났다. ‘아굴의 잠언’으로 알려진 말씀이다.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소서.’(잠언 30:8) 이 말씀은 여전히 필요한 양식에 쪼들리며 압박받던 나를 해방시켜 주는 자유의 메시지가 되었다. 더 나아가 나를 한평생 이끌어 가는 생활신조요 온갖 부와 물질을 대하는 나의 물질관이 되었다.

매일의 새벽마다 올리는 기도에서 필요한 양식을 구했던 긴 시절이 있었다. 매일 일용할 양식만으로 자족함을 배우는 기간이었다. 어느새 필요 이상의 물질은 내 삶에 윤택을 갖다 주는 것이 아니라 부담스러운 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도 되었다. 장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가능한 한 아껴 쓰고 비축해 두는 것이 삶의 지혜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이 또 내 삶에서 즐거움을 앗아가는 애물단지 같은 것이라는 사실도 좀 더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주위 사람들의 필요를 외면하고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 쌓아 둔 부는 결코 새벽 공기처럼 신선하지 않았다. 나의 작은 것을 가지고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인지를 배웠다.

한때 내 주위에는 교도소에서 출소한 사람들이 끊이지 않던 때가 있었다. 학비가 모자라 어려움을 겪는 분들도 있었다. 이름 모르던 노약자와 병중에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던 때도 있었다. 그들의 떨리는 손을 잡아 주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큰 기쁨이었다. 신출내기 변호사 시절 한때도 나의 주머니에는 물질이 편안하게 잠잘 시간이 별로 없었다.

어느 날 문득 나를 일깨우는 생각 하나는 소득의 십일조 외에 수임한 사건의 십일조를 드리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즉시 시행하기로 작정했다. 딱한 처지의 사람을 골라 열 개 사건 중 하나꼴로 무료 변론을 해주는 일이었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재산은 별로 없었지만, 필요를 채우시는 거룩한 손 아래서 마음은 늘 즐거웠다. 독일 유학은 시종 아데나워재단이 나의 후원자였다. 그 후 반복됐던 본격적인 연구여행은 독일 훔볼트재단이 밀어주었다. 하버드대 동아시아법연구소 체류는 서암학술재단이 도와주었다. 필요한 것 이상을 갖지 못했으나 필요를 알고 그때마다 채우시는 손길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나의 삶, 그래서 늘 감사하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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