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노성열 경제산업부 부장

21 대 0. 이게 무슨 숫자일까. 축구는 아니고, 큰 점수 차로 인한 야구의 콜드게임 패? 아니다. 바로 일본과 우리나라의 노벨상 수상자 비교다. 물론 전체를 따지면 24 대 1이지만, 평화상과 문학상을 제외한 순수 과학(물리학·화학·생리학 및 의학) 분야의 실력 차는 이 정도라는 걸 보여주는 상징적 숫자라 하겠다. 왜 이렇게 됐을까. 더 말할 것도 없다. 역대 정부마다 되풀이된 ‘과학 푸대접’의 귀결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5년 베트남전 파병 때 미국의 원조금을 종잣돈으로 홍릉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에 나선 것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출발과 궤를 같이한다. 이후 조금이라도 실용에 눈을 뜬 정부는 이 과학입국 정신을 이어나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보통신 선진국을 내걸고 정보기술(IT) 코리아를 만든 것처럼. 그러나 다른 데 정신이 팔린 정권들은 말로만 과학을 내세우고 실제로는 무심했다. 과학의 날에 취임 첫해 참석해 축사 한 번 하고는 임기 내내 대독(代讀)으로 일관했다. 대통령 옆에 과학기술 장관을 빼고 이공계 참모는 거의 없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연구·개발(R&D) 예산 비중은 일본보다 높은데 노벨상도 없고 원천기술도 나오지 않았다.

어제는 74주년 광복절이었다.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라던 문재인 대통령은 목소리를 다소 낮춰 이날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자”고 비장하게 말했다. 태평양전쟁은 원폭 두 발로 종지부가 찍혔다. 과학에서 미국에 뒤져 눈물을 흘렸던 일본은 기초기술 강국으로 우뚝 섰다. 우리도 ‘사농공상’의 전근대적 관념을 버리고 인공지능 강국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한·일 무역 갈등은 전쟁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그러나 전세는 결코 녹록지 않다. 전문가들은 한·일 분쟁을 “21세기 기술전쟁”이라 잘라 말한다. 군사패권에서 경제패권으로, 이제 기술패권으로 국가 간 경쟁은 진화하고 있다. 19세기 말 의병과 죽창으로 덤벼들 문제가 아니라는 진단이다. 일본의 수출 제한 반도체 소재 3종이 단숨에 국산화가 가능한 것처럼 말하는 대통령 주변 사람들은 경제를 모를뿐더러 과학기술에 대한 무지(無知)도 동시에 드러냈다.

6년째 와병 중인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은 쓰러지기 직전 “제품은 일본을 이겼고, 부품도 웬만큼 따라왔는데 이제 소재에서 1등을 할 때”라며 수원에 국내 최초로 전자소재연구단지를 완공했다. 일부 세력에 의해 ‘적폐’로 내몰리는 그의 혜안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지금 같은 수모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과학기술계도 똘똘 뭉치고 있다. 카이스트·서울대·포스텍이 기술자문단을 출범시켰고,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와 공학한림원·과학기술한림원은 ‘일본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과학기술계 대응방안’ 토론회를 열고 과학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았다. 한·일 기술패권 전쟁은 그동안 홀대해왔던 과학기술인의 소중함을 되돌아보고 제대로 평가하는 절호의 기회다. 과학은 국력이란 21세기 공식을 지금이라도 깨쳐야 한다. 특히, 지난 60년간 공학과 기술로 경제성장을 이뤄냈다면 이제 기초과학으로 미래 기술을 키워야 할 때다. 기초과학은 손자세대를 위한 연구다. ‘과학계의 붉은 악마’들이 월드 과학 4강에 오르는 장면을 보고 싶다.

nos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