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법원의 징용판결 이후 9개월, 일본 정부가 경제 보복을 선언한 지 1개월 가까이 지났다. 초기에는 일본의 대책과 협상 요구를 한국이 외면했고, 지금은 한국의 경제 보복 철회 요구를 일본이 묵살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와 아베 신조 일본 정권의 명분 싸움에다 급기야 두 정상의 감정 대립 양상까지 겹치면서 양국 관계는 ‘외교(外交) 실패’에 도달했다고 할 만큼 악화일로를 거듭해왔다. 급기야 다음 달 2일 아베 총리는 각의에서 한국을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한다. 양국 경제계 등에서 자제를 요청하는 목소리가 있지만, 현재로서는 그런 방침을 번복할 만한 사정 변화는 감지되지 않고 있다.

한국이 일본 정부의 화이트리스트에서 빠지면 8월 하순부터 1115개 전략물자를 일본 회사들이 한국에 수출할 때 일일이 일본 정부 허가를 받아야 한다. 반도체 등 핵심 소재 3종에 머물던 경제 보복 조치보다 훨씬 파장이 클 수밖에 없다. 더 심각한 것은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믿을 수 없는 나라’로 낙인찍힌다는 점에 있다. 한국 정부도 보복에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외교적 대화의 숨구멍이 열리고 있어 주목된다. 양국 외교장관이 26일 통화를 한 데 이어 오는 2일 태국 방콕 아세안 지역안보포럼(ARF) 기간중 한·미·일 외교장관 회담도 열릴 전망이다. 한·일의원연맹 회장들은 31일 일본서 회동을 가질 예정이라고 한다.

더이상 양국 관계가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지 않기 위해선 문 정부가 실질적인 외교 해법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한·일 충돌의 출발점은 징용 배상 판결에 있는 만큼,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하면서도 한·일 외교 파국을 막기 위한 창의적 방안이 필요하다. 여권 일각에서 나오는 ‘1+1+α’ 구상을 보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물론 대전제는 문 대통령의 ‘1965 체제’ 유효 선언이다. 좋든 싫든, 한·일 양국은 식민지배 문제에 대해 ‘부동의의 동의(agree to disagree)’ 형태로 봉합해 반세기 동안 관계를 발전시켜 왔다. 이를 허물지 않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접점 모색은 그리 어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