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위안부 재판과 ‘국가 면제’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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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열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최근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며 이중용도 전략물자 수출관리에서 화이트리스트 지위 특혜를 취소하겠다고 했다. 일본이 신뢰를 잃었다고 한 건 징용판결 자체가 아니다. 그로 인해 청구권협정의 해석 분쟁이 발생했는데도 한국 정부가 협정에 명시된 분쟁 해결 방법을 계속 거부해 왔다는 것이다.

한편, 지난 5월부터 일본을 상대로 한 위안부 피해자 손해배상 사건 절차가 서울중앙법원에서 개시됐다. 당초 일본이 국제법상 ‘국가 면제’를 이유로 법원이 보낸 서류를 접수하지 않자, 공시송달 방식으로 재판이 개시된 것이다. 이 사건은 피고가 ‘일본국’이라는 점에서 미쓰비시 등 민간기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사건과는 국제법상 큰 차이가 있다. 이번 사건은 피고가 일본이라는 국가이므로 손해배상 인정 여부에 관한 본안 판단에 앞서, 일본의 국가 면제 또는 관할권 면제가 인정되는지 여부가 먼저 판단돼야 한다.

국가 면제란, 주권국가 평등의 원칙에 입각해 국가의 고권(高權)을 인정하고, 고권적 행위는 다른 국가 법원의 재판관할권으로부터 면제된다는 국제법 원칙이다. 1998년 대법원 판례도 고권적 행위에는 국가 면제가 인정된다고 했다. 위안부 운영은 상업적 행위가 아니라 고권적 행위이므로,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일본의 국가 면제가 인정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법원의 재판권이 없으므로 원고들의 청구는 각하돼야 한다.

일각에서는 국가 행위가 반(反)인륜 범죄 등 강행 규범 위반인 경우엔 국가 면제가 부정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번 사건에서도 위안부 운영이 강행 규범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국가 면제는 부인돼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2012년 국제사법재판소는 강행 규범에 위반되는 행위에도 국가 면제가 인정돼야 하며 이탈리아 대법원이 독일의 국가 면제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했다. 미국 연방법원도 위안부 피해자 소송에서 일본의 국가 면제를 인정했다.

국가 면제가 인정된다고 해서 피해자가 가해국으로부터 배상을 못 받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가 가해국으로부터 배상을 못 받으면, 피해자의 국적국이 가해국을 상대로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한국은 일본과 1965년에 청구권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이미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했다. 위안부 피해자의 개인청구권과 관련해 청구권협정 해석 분쟁이 발생하면, 한국 법원은 일본을 배제한 채 독자적으로 협정을 해석할 수 없다. 청구권협정에도 해석 분쟁은 한·일 양국이 합의한 방식으로 해결하도록 이미 명문으로 규정돼 있다. 더욱이 2015년 한·일 정부는 일본 정부의 10억 엔 제공을 조건으로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최종 해결을 합의했다. 물론 이 합의는 국회 동의를 얻지 않았기에 법률의 효력이 있는 조약은 아니다. 그러나 이 합의에도 국제법상 신의칙이 적용되므로, 이미 합의한 내용을 일방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이번 사건에서 만약 법원이 국제법상 국가 면제를 부인하고 일본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게 되면,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 된다. 그러면 한·일 기본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붕괴될 수 있다. 이번 사건에서 법원이 국가 면제를 인정하더라도, 원고들은 일본 정부가 이미 제공한 10억 엔에서 보상받을 수 있다. 징용 문제든 위안부 문제든 청구권협정 해석 분쟁은 국내법이 아니라 국제법에 따라 해결해야 한다. 법원과 정부 모두 국제법에 합치되는 판단이 있기를 고대한다.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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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용·위안부 재판과 ‘국가 면제’ 원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