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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평 논설위원

지난해 공공기관의 고용세습 논란이 빚어졌을 때 몇몇 국회의원은 정규직 전환자의 친인척 재직 여부 등을 확인하려고 자료를 요청했다. 해당 공공기관에선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답변을 보내왔다. ‘블라인드 채용으로 개인정보를 수집하지 않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엔 지원서와 점수표 등을 꼼꼼히 살피면 친인척 관계와 특혜 여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블라인드 채용은 공정하게 뽑자는 취지인데, 연줄과 청탁이 작용할 소지를 외려 더 키운 것이다.

블라인드 채용은 2017년 6월 문재인 대통령이 말을 꺼낸 뒤 10여 일 만에 332개 공공기관과 149개 지방공기업을 대상으로 전격 도입됐다. 이력서 항목에서 성별·사진·학력·출신지·가족관계·신체조건이 사라졌다. 남은 건 이름과 연락처 정도다. 이것만으로 선발하라고 하니 기막힌 일이 속출했다. 정부가 한국·울산·대구경북·광주 과학기술원에도 블라인드 채용 지침을 내리면서 이들 학교는 교수 지원서에서 출신 대학명 기입란을 없앴다고 한다. 특히 과학·기술 분야는 대학마다 중점을 두는 전공이 다르고, 석학이 있는 곳의 평가가 후한 것이 관례다. 실력 있는 교수를 뽑는 것은 학생의 학습권과 직결된다. 바뀐 방식으론 미국 MIT나 하버드대 출신도 울고 갈 처지다.

고용노동부가 블라인드 채용 도입 직후인 2017년 하반기 공공 기관 입사자를 분석했더니 비수도권 출신은 상반기 57.7%에서 55.6%로, 여성 비율은 44.9%에서 42.4%로 줄었다. 구직 청년들이 선망하는 서울지역 금융공기업에서도 ‘SKY’ 출신 비중이 더 커졌다. 극히 제한된 정보론 인재를 가려내기 어려워 필기시험 난도를 높인 결과다. 공정을 앞세운 결과치곤 민망하다. 외국의 블라인드 방식은 인종·성별·나이 등 차별을 막는 게 초점이다. 대신 후천적 노력으로 얻은 실력 검증에 소홀함이 없다.

블라인드 채용을 담은 개정 채용절차법이 17일 시행되면서 30인 이상 민간기업도 사정권에 들어갔다. 주소는 물어볼 수 있지만, 출신지를 물으면 불법이다. 오히려 주소는 금수저인지 흙수저인지 짐작할 자료가 될 수 있다. 지원자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밝힐 수 없는 홍길동 신세다. 우수한 인재 선발이 곧 기업엔 경쟁력이다. 정부가 획일적 기준을 강요하고 처벌할 일이 아니다. 문 정부의 ‘기업 괴롭힘 법’ 리스트가 점점 두꺼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