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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곤 가천대 석좌교수·정책학 前 행정안전부 장관

적폐청산으로 공직사회 不動
차기 적폐委에 걸릴 일도 경계
‘코드 보고서’는 식은 죽 먹기

청와대-행정부 동맥경화 重病
‘어공’앞에서 ‘늘공’은 눈치만
구호 난무할 뿐 難題 도전 실종

현 정부는 혁명정부다. 상징은 촛불이다. 하지만 관료들에게는 혁명이나 촛불보다 청와대가 지시한 적폐청산위원회라는 주체세력이 더 무서웠다. 그들은 공직자들의 과거 행적을 낱낱이 들춰냈다. 실무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무슨 법적 권한을 가졌는지 따질 겨를도 없었다. 공직사회는 얼어붙었다.

많은 공직자가 세종시에 있다. 가족도 친구도 반 이상 떨어져 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절반 이상 끊겼다. 무두일(無頭日)에는 별로 긴장할 필요가 없다. 편안하기는 하다. 카카오로 보고하고, 서울 가서는 커피집에서 공문서를 만진다. 몸이 떨어지면 맘도 멀어지게 마련이다. 국사는 청와대와 언론이 관장하고,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 물론 차기 적폐 위원회가 건드릴 만한 일은 피해야 한다. 녹음도 마다하지 않는다. 때때로 청와대에 파견된 부처 직원을 통해 분위기를 전달받고, 입맛에 맞는 보고서를 만드는 일쯤은 도가 튼 지 오래다.

스스로를 촛불의 위임민주정부(delegative democracy)라고 자임하는 이 정부는 청와대 정부다. 행정부는 보이지 않는다. 검찰만 예외다. 입법부와는 혼란 지경에 들어서 있다. 실세들이 사법부를 정치적으로 몰고 가는 것쯤이 무슨 대수랴. 섣불리 추진한 정책의 부작용은 축적돼 가고, 경제는 가라앉고 있는데도, 자릿값을 하는 인사가 보이지 않는다. 일은 뒷전이다. 온통 싸움판이다. 상식적인 인간 도리를 넘어서는 대북 저자세 하나만은 걸물이지만….

청와대는 문제 해결책을 고안하거나 새 정책을 설계할 수 있는 곳이 못 된다. 분야별 전문가도 없고, 대통령의 일정 뒷바라지로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는 조직이 아니다. 문제 해결책은 행정부에서 와야 한다. 해서 청와대는 깊이 있어 빈 것처럼 보여야 하는 심장여허(深藏如虛) 공간이어야 한다. 그래야 심장의 피가 머리로 잘 올라갈 수 있다. 정책 협의와 정보가 오르내려야 할 청와대와 행정부의 경동맥은 국가 제도 정렬(alignment)의 핵심이다. 상방환류(feed back)는 관계를 성숙시키고 정책을 완성시킨다.

청와대가 혁명군의 본부고, 인사수석실이 부처 실무자의 인사에까지 관여하고, 어공(정치적 특채자)들이 정치적 언행으로 나서면 파견된 늘공(경력직 공무원)들은 엄중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지시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늘공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바로 친정에 전한다. 새로운 정책의 제안은 올스톱한다. 하향식 경화된 정렬은 과잉 동조를 불러오고, 상방환류를 막는다.

지금 한국 사회가 당면한 문제의 해결과 도전은 과거 선진국 추격 방식으론 안 된다. 창의적인 토착 정책이 아쉬운 시기에 현 정부가 만든 하방 경직 연결고리는 신적폐다. 창의가 죽고 혁신이 간판에 머물게 마련이다. 위험이 있는 도전적 정책은 언급조차 되지 못한다. 높은 분업 체계에 분야별 전문가들로 구조화한 행정부가 상층부에 제대로 된 의사를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대통령의 고용과 경제 상황 인식은 상향 흐름이 온전치 않다는 증좌다. 몇몇 집행 단계에 있는 정책 부작용에 대한 피드백이 불충분함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그래서 공직자들은 오래전부터 말 못할 때 써 왔던 정책 수단을 반복적으로 쓰는 데 만족하고 있다. 반복되는 추경, 사회갈등의 재정 지원, 번지르르한 장기계획, 부동산 규제, 유류세 인하, 수많은 보조사업, 안전 점검 등이 그러한 수단들이다. 슬로건과 정책의 간판은 변했다. 현상은 변했지만, 실질은 과거를 답습하고, 문제를 빙빙 돌 뿐이다. 부처마다 안고 있는 폭탄들은 어느 하나도 제대로 도전해 보지 못하고 있다. 이 정도면 살아 움직이는 창의적 행정부가 아니다.

높은 고용과 일자리, 소득 평준화, 재정 건전성, 효율과 생산성, 경제성장률이 모두 다 좋은 포용사회는 인간의 이상을 넘어서 상상 속에만 있을 모순체다. 유럽의 소국처럼 단순하지도 않은 한국 사회의 날줄과 씨줄도 고려돼야 한다. 몇 가지는 포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복잡한 난제(難題)들의 조합과, 파생되는 부작용의 관리는 정교하고 유연한 협업 체계를 만들지 못하면 어렵다. 신뢰를 바탕으로 전문가들의 브레인에 스톰(brain storm)을 치지 않고서는 새로운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없다. 입만 열면 분권과 자율, 참여와 혁신을 거론하면서 집권 경화증에 걸린 청와대의 수술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