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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싱키 프로세스와 인권

기사입력 | 2019-06-13 12:04

이도운 논설위원

1975년 7월 30일부터 사흘 동안 핀란드 헬싱키에서 유럽과 미국, 캐나다 등 35개국이 참석하는 유럽안보협력회의(CSCE)가 열렸다. 유럽에서는 폐쇄정책을 고집했던 알바니아를 제외한 33개국이 모두 참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 진영이 처음으로 유럽의 안보를 논의한 회의였다. 회의 결과, 국경선 존중과 경제·과학·기술·환경 협력, 인권 보호, 후속 조치 등 4개 항의 합의가 이뤄졌는데, 이것이 헬싱키 협정이다.

헬싱키 회의를 앞장서 추진한 나라는 소련이었다. 동·서로 나뉜 독일의 통일을 막는 것이 우선 목적이었다.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방정책을 추진하던 시기였다. 소련은 또 동유럽 위성국가들의 국경을 유지하려는 의도도 갖고 있었다. 따라서 헬싱키 협정 제1항의 국경선 존중은 소련이 얻어낸 외교적 승리로 인식됐다.

그러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인권 보호와 사상의 자유로운 교류를 규정한 제3항이 힘을 발휘한 것이다. 당시 협상에 참여했던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소련이 1956년 헝가리,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처럼 반체제 시위를 탄압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바츨라프 하벨, 폴란드에서 레흐 바웬사 같은 반체제 지도자들이 등장했고, 배급 경제 체제 붕괴 등 수많은 요인이 작용한 결과 소련은 1991년 해체된다. 1975년 협정 체결부터 1991년 소련 해체까지의 과정을 ‘헬싱키 프로세스’라고 지칭한다.

헬싱키 프로세스를 북한에 적용해 핵과 인권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미국은 2004년 북한인권법을 제정하고 CSCE와 같은 국제협력체 설립을 제안했다. 법안 발의자도 미국헬싱키위원회 대표였던 샘 브라운백 상원의원이었다. 박근혜 정부가 천명했던 동북아 평화협력구상도 헬싱키 프로세스를 모델로 삼은 것이다. 한·미 모두 6자회담이 CSCE의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북한에는 무용지물이었다. 알바니아보다 더 철저한 통제와 인권탄압으로 ‘반체제’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핀란드 방문에 맞춰 또다시 헬싱키 프로세스 얘기가 나왔다. 공허한 구호일 뿐이다. 김정은이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도록 국제사회가 일치된 목소리로 압박하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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