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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좌절 켜켜이 쌓인 무대… 휴일에도 준비 안하면 불안”

기사입력 | 2019-06-12 11:16

김광보 서울시극단 단장이 극단 사무실이 있는 세종문화회관 복도에서 포즈를 취했다. 배우들에게 지침을 주는 연출가인 그는 카메라가 자신을 찍는 것을 쑥스러워하면서도 웃음을 띠었는데, 벽면 유리에 반사된 그의 옆모습은 또 다른 표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김선규 선임기자 ufokim@  김광보 서울시극단 단장이 극단 사무실이 있는 세종문화회관 복도에서 포즈를 취했다. 배우들에게 지침을 주는 연출가인 그는 카메라가 자신을 찍는 것을 쑥스러워하면서도 웃음을 띠었는데, 벽면 유리에 반사된 그의 옆모습은 또 다른 표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김선규 선임기자 ufokim@


김광보 서울시극단 단장·연출가

고교 졸업뒤 ‘모집 벽보’보고
무작정 극단 지원하면서 입문
극단 ‘청우’만들고 3년뒤 파산
가족들 처가 보내고 고시원行

연극·뮤지컬 100여편 무대에
최근 오페라 ‘베르테르’ 도전
음악·가사 한달만에 통째 외워

연출은 타자화·객관화가 핵심
작가를 겸하면 그것을 잃게 돼


그는 19세 때 극단 ‘현장’에 들어갔다. 부산 금성고를 졸업한 직후였다. ‘워크숍 단원 모집’이라는 벽보를 보고 무작정 극단 문을 열었다. 워크숍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였다. 그렇게 연극에 입문한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연출가 중의 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연극, 뮤지컬, 오페라 등 각종 장르에서 100편이 넘는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공연계 안팎에서 그를 스타 연출가라고 부른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연출자로서 소양이 부족해서 휴일에도 일을 해야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김광보(55) 서울시극단 단장. 그는 일요일인 지난 9일에도 극단 사무실에 나와 일을 했다. “남들 다 쉬는 날에 나와서 뭘 했느냐”고 전화로 물었더니, 그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재차 물으니 그때야 “서울시 산하예술단 통합공연 연출을 어떻게 할지 구상해봤다”고 했다.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특유의 수줍은 미소를 떠올리게 했다.

그를 최근에 작품으로, 대면으로 자주 만났다. 그가 오페라를 처음 연출한 것으로 화제에 오른 ‘베르테르’를 지난 5월 초에 봤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세종음악기행’ 시연회에 연출자로 나온 그를 만났다. 이후에 세종문화회관 관계자로부터 그가 올여름에 연극 ‘그게 아닌데(극단 청우)’ ‘비BEA(제작사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를 잇달아 연출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9월엔 서울시극단 연출가전에서 예술감독을 맡고, 11월엔 연극 ‘물고기 인간’을 연출할 예정이다. 한시도 쉴 틈 없는 일정이다. 지난 5월 29일 인터뷰를 청해 그의 사무실로 찾아가 물었다.

―왜 쉬는 기간 없이 일을 하나. 일 중독인가.

“실패, 좌절의 경험이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내가 많이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전에 준비하지 않으면 많은 걸 놓친다. 그러니 철저하게 준비해야 마음이 편하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쉬는 날이 없게 되더라.(웃음)”

―단장이 휴일에 나오는 것은 단원과 직원들에게 민폐다.

“단원들에게는 푹 쉬라고 한다. 그렇게 하는 게 작품에도 좋다. 기획팀이 휴가 기간에도 나와 일하는 것은 미안하다. (서울시 산하) 다른 단체 눈치도 보인다. 나도 생각을 해 본다. 여기서 정말 열심히 일하는데, 의무감 때문일까, 나를 위해서인가. 그런데 내가 휴일에 사무실에 나오는 것은 일의 연장이지만, 휴식이기도 하다. 사무실에 나오면 에어컨도 시원하니 여기서 쉬는 거다. 일도 하고, 낮잠도 자고 ….”

그는 또 웃음을 흘렸다. 인터뷰 내내 자주 웃었는데, 호쾌함을 과시하려는 여느 남자들의 너털웃음과는 달랐다. 수줍음과 민망함을 가려보려는 쪽이었다.

―취미가 없나. 술도 안 먹는다고 알고 있다.

“일이 취미다.(웃음) 영화 보는 것을 정말 좋아했는데, 여기 와서는 그것도 못하고 있다. 술 먹는 것은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술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면 좋은 아이디어도 나오지만, 대부분 자기 넋두리에 그치는 경우가 많더라.”

―오페라를 처음 해 보니 연극, 뮤지컬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특별히 다른 점은 없었으나 준비 기간이 길었다. 내가 불행하게도 악보를 못 본다. 그래서 음악과 가사를 통째로 외워야겠다고 마음먹고 한 달 정도 걸려서 다 외웠다. 오페라 언어가 원어니까 준비를 철저히 했다. 망신당하지 않으려고.”

―뮤지컬 ‘신과 함께―저승편’ 등으로 뮤지컬에서도 연출력을 과시했다. 그런데 무대예술 하는 이들은 대개 뮤지컬보다 연극이 더 예술답다고 하더라.

“고리타분한 이야기지만, 연극은 순수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뮤지컬은 산업의 산물이고. 영국 연출가 피터 브룩이 예언했었다. 20세기 말에 연극은 사양 산업이 될 거라고. 그게 맞았는데 뮤지컬은 산업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연극과 뮤지컬에 갭이 생겼다.”

―김 단장도 연극에 더 애정이 있나.

“연출은 연극을 베이스로 하는 일이다. 그러니 연극에 애정이 훨씬 높다고 봐야 한다. 뮤지컬은 각 작업이 분업화돼 있다. 그걸 조합만 하면 되는 게 연출자 역할이다. 연극은 연출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개입한다.”

―연극 연출자는 독재자 성향이 있다는데, 당신은 섬세해서 더 그럴 듯싶다.

“배우들과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다. 무대에서 왜 그래야 하는가, 서브텍스트(대사로 표현되지 않은 생각, 느낌, 판단 등)는 뭔가. 이런 원론적 질문을 많이 주고받는다.”

―김 단장을 설명하는 말로 자주 쓰이는 ‘배우 중심’과 ‘미니멀리즘’은 서로 통하는 개념 아닌가.

“어려서 연극할 때 너무 가난하니까 세트를 세울 수도 없더라. 그래서 배우 중심으로 놔야 하겠다 싶었다(웃음). 그것이 여러 과정을 거쳐서 미니멀리즘으로 심화됐다. 그 과정에서 내게 감명 깊었던 문장이 있었다. 미국 미술가 로버트 모리스의 말이다. ‘형태의 단순함이 경험의 단순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내 입장에서 해석했다. 무대의 형태는 단순하지만 배우를 통해 경험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베르테르’도 여느 오페라에 비해 단순하게 전환하고 변화하는 무대인데, 가수들이 깊이를 만들어냈다.”

―2015년부터 서울시극단 단장으로 일하고 있다. 재임 중인데, 공무원이 체질에 맞는가.

“반반씩 타협하며 맞추고 있다. 반은 수용하고, 반은 예술이라는 미명으로 내 마음대로 한다.”

―수용할 때와 마음대로 할 때의 사례를 들면.

“세부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으나, 조직 사회 룰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 룰에서 단원들에게 자유롭게 해줘야 하는 부분이 있으면, 유연성을 발휘한다. 예술단은 단장 체제로 움직이니까 가능하다.”

그는 그러면서 “(공무원 생활을) 내가 너무 오래하고 있다”고 중얼거렸다.

―서울시극단 단장으로 무대에 올린 것 중에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2016년도에 ‘헨리 4세’ ‘함익’ 등을 무대에 올렸는데, 작품 완성도와 관객 반응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듯한 느낌이었다. 공직에서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수지율도 괜찮았다. 올해 2019년도 기대하고 있다. ‘함익’ 앙코르 공연에 대해 관객 반응이 좋았다.”

―예술성과 상업성을 잘 조화시킨다는 평을 들어왔는데.

“실패한 경험을 통해 얻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연극은 시대를 고민하며 정치, 사회적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게 다이렉트로 가면 관객에게 부담을 준다. 그걸 돌려서 이야기하는 방법을 찾고, 무대를 통해 그 결과물이 나와야 한다.”

그에게는 무대 공간에 대한 특별한 미학이 있다. 연출가는 작가를 겸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연출자의 가장 큰 덕목은 타자화, 객관화하는 것이다. 작업하다가 막히면 배우와 함께 무대에서 해결해야 한다. 작가를 겸하는 연출자는 대본을 고치는데, 그러다 보면 연극의 공간성을 잃어버린다.”

―연극을 시작했던 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고교 졸업 후 극단에 왜 들어갔는지 그 이유를 스스로 모른다고 했는데.

“지금도 모른다. 그 전에 연극을 본 적도 없다. 그 이유를 전혀 모르지만, 다만 나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탈출하려는 욕망이 강했던 게 아닌가 싶다. 환경을 극복하고 싶은 뭔가가 필요했던 듯싶다.”

그는 한때 ‘고졸 거인’이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었다. 나중에 대학 학사 학위를 얻어 그 이름을 떨쳤으나, 가정환경이 그의 연극 입문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형제가 많았나.

“6남매 중 넷째로, 두 아들 가운데 차남이다. 어려서는 유치원을 2년 정도 다녔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때 가세가 갑자기 기울었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항만 하역 계통에서 일했는데, 부당 거래에 개입한 것이 적발됐기 때문이다.”

―극단에서 운영 투명성을 문제 삼았다가 쫓겨났다고 하던데.

“극단의 스터디그룹 막내였다. 형들 하는 대로 따라 했을 뿐이다. 극단에서 나가라고 하더라.”

그는 이후 극단 ‘부두’의 창단 멤버가 됐다. ‘부두’는 부산 가마골 소극장을 극단 ‘연희단거리패’와 함께 사용했다.

―그때 무대감독 겸 극장장이었다고 들었다. 20대의 젊디젊은 극장장인데, 명령 체계가 섰는가.

“내가 할 일은 했으니까. 스물넷, 스물다섯쯤 때인데, 내가 재능은 있었나보다.(웃음)”

―조명기사 이력이 있더라. 부산문화회관에서 2년 1개월, 서울에 올라온 후 바탕골 소극장에서도 상당기간 조명 담당으로 일했는데, 연출에 도움이 됐나.

“1980년대 초에 극단 형들과 스터디를 했을 때, 그 당시 필독서인 월간 ‘한국연극’ 1970년대 판을 열심히 읽었다. 책에 깊이 있는 내용이 많았다. 유덕형 연출가 인터뷰 중에 “연출가 덕목 가운데 하나는 조명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라는 말이 있더라. 실제로 조명을 알면 멀리서 전체를 보기 때문에 연출에 도움이 된다.”

그는 이 대목에서 뜻밖의 고백을 했다. “사실 부산에서 배우를 했었다. 자의식이 강해서 배우가 안 되더라. 뭘 할까 하다가 조명을 배웠다. 내심으로 언젠가 연출을 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듯싶다.”

―외모만 보면 배우해도 괜찮았겠다.

“부산 사투리 발음이 난제였다. 도저히 배우를 할 수 없겠더라. 서울 생활을 30여 년 하니 말 습관이 바뀌었다. 처음엔 지역 기질대로 우다다닥 빨리 말했으나, 배우와 소통하는 과정에서 말이 느려지더라. 드센 사투리로 속사포처럼 이야기하면 배우들이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까.(웃음)”

그의 사투리 타령 때문에 역시 부산 출신인 배우 송강호, 김윤석의 발음에 관한 이야기가 잠시 오갔다.

―만 30세 때 연출가로 데뷔하고, 그 직후에 극단 ‘청우’를 만들었다. 젊었던 그때와 지금은 뭐가 다른가.

(그는 1994년 봄에 극단 ‘종각’을 통해 첫 연출작 ‘지상으로부터의 20미터’를 내놨다.)

“겁 없이 시작했다. 연출을 해보니까 그룹이 필요해서 극단까지 만들었다. 그때는 모든 관점의 중심이 저에게 있었다면, 그 중심이 이젠 타자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내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봤으나, 이제 시대 상황 등을 통해서 보게 된다.”

극단 청우는 3년 만에 파산했다. 그는 “은행과 집에서 돈을 갖다 쓰기만 하고 갖다 주지 못했다”고 되돌아봤다. 아픈 기억이겠으나 표정은 담담했다.

―부인과 딸을 처갓집으로 보내고 대학로 고시원에서 생활했다던데.

“그 이야기를 또 해야 하나, 허허! (그때 처갓집으로 보냈던) 그 딸이 지금 24세가 됐다. 작곡·편곡을 배우고 싶다며 일본에서 공부한다. 실용음악을 하는 것인데, 그 아이 뒷바라지를 한다고 정신이 없다. 학비도, 생활비도 많이 드니까.”

그는 청우 파산 후 대학로 고시원에서 1년 정도 살았다고 했다. “그때 극단 미추의 손진책 선생을 찾아갔다. 그분은 1995년부터 내가 만든 연극을 계속 보시며 ‘미추에서 작업을 해 보자’고 제안했다. 그걸 기억하고 찾아가서 연극을 하게 해 달라고 청했다. 손 선생이 뭘 하고 싶냐고 하기에 박상륭의 소설 ‘뙤약볕’을 무대에 올리고 싶다고 했다.”

삶의 그늘에 있던 그는 ‘뙤약볕’으로 햇살을 받아 재기에 성공한다. 백상예술대상 신인 연출상 등을 받으며 일약 주목받는 인물이 된 것. 극단 청우를 다시 일으킨 그는 2004년에 창단 10주년 기념작으로 ‘뙤약볕’을 재공연했다. 그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작품이다”라며 그답지 않게 감격 어린 멘트를 했다.

그는 오페라 ‘베르테르’를 통해 100번째 작품 연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은 그게 102번째더라. (일부 매체에) 보도가 됐기에 뒤늦게 따져보니 100번째 작품은 ‘사막 속의 흰개미’였다. 101번째가 ‘함익’이고. 신작은 70편인데, 앙코르 공연을 포함하면 ‘베르테르’가 102번째 작품이 된다.”

그는 다작이면서도 태작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30여 개에 달하는 각종 수상 기록이 그걸 증명한다.

―수많은 상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첫 번째 상을 받은 게 기억난다. 1997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았을 때 영광스러웠다. 한국연극평론가협회에서 뽑는 ‘올해의 연극 베스트 3’에 세 작품(‘인류 최초의 키스’ ‘그게 아닌데’ ‘옥상 밭 고추는 왜’ 등)이 오른 것도 기뻤다. ‘줄리어스 시저’로 동아연극상을 받은 것도 의미 있었다. 이해랑연극상은 작품이 아니라 전체 역량을 평가한다는데, 상금이 많더라.(웃음)”

―배고픈 연극계의 스타가 됐다. 그 비결은.

“내가 그런 평가를 받는다면 성실했기 때문이 아닐까. 스트레스가 생기면 일을 더 해 버렸다.”

그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보다는 장인정신으로 한 작품 한 작품 완성도를 높이는 데 집중해왔다. 그 이유에 대해 한마디로 답했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인터뷰=장재선 문화부 선임기자 jeije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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