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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뼘의 땅도 포기 못한다”… 백두산 전역을 우리 영토로

기사입력 | 2019-06-12 11:14


“역사를 공부할 때 중심좌표 세우는 게 왜 필요한가요?”

이달 말에 있을 세계한국학대회 세종세션을 기획할 때 어느 분이 던진 질문이다. ‘한국학의 랜드마크, 세종학의 위상과 비전’이라는 대주제를 정하려는 우리에게 그분은 어느 시기든 당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땀과 눈물 그리고 피로 채워지지 않은 곳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이탈리아의 역사에 대해서 말씀드렸다. 제1, 2차 대전 때 이탈리아는 전쟁 도발국으로 가담했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연합국 쪽으로 전향하거나 패전국이 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이탈리아에서 배울 게 있다고 보는 것은 고대 로마의 역사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는 또 어떤가? 청나라 말기 아편전쟁 패배로부터 만주국에 이르기까지, 중국 역사는 국공내전 등 지리멸렬함으로 점철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중국의 역사 하면 당태종의 ‘정관의 치(治)’를 떠올리고, 강희·옹정·건륭제의 치세를 이야기한다. 이번에 발표될 강희제 논문에서 보듯이, 그리고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 논문에서 밝혀지듯이 탁월한 지도자가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과 성취는 국격(國格)을 확연히 끌어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그 나라 역사 전반을 균형 있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과연 세종시대는 우리 역사의 랜드마크인가? 어떤 분은 가장 영토가 넓었던 고구려를 한국학의 이정표로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내 생각은 다르다. 물론 고구려인의 기상과 제국경영의 리더십을 자세히 연구하고 배워야 한다. 하지만 그 시대에 대한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고구려인의 기상이며 리더십이 어떻게 길러졌고,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발휘됐는지를 밝혀내는 데 일정한 한계가 있다. 결국 세종시대를 우리 역사의 분수령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는 게 학술회의 기획자들의 결론이었다.

어떤 점에서 세종시대를 우리 역사의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는가? 세종 이전과 이후를 비교할 때 크게 달라진 것으로 우선 ‘지도(地圖)’를 들 수 있다. 1402년, 즉 태종 2년에 만들어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보면 두만강 부분의 국경선이 불분명할뿐더러 백두산이 안 보인다. 이에 비해 1481년(성종 12년)에 완성된 ‘팔도총도’를 보면 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 이어지는 국경선이 선명하고 백두산의 위상이 부각돼 있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왔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세종의 ‘백두산 프로젝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이 재위 중반부에 백두산에 대해 아주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백두산의 서남쪽에 살고 있는 조선 사람들을 조사하게 하는가 하면(세종 15년), 세종 18년(1436년)에 정척에게 그려 오도록 한 평안도와 함경도의 지도에는 백두산의 위치를 부각시켜 그리도록 했다.

세종 23년(1441년)경에 마무리된 6진 개척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백두산 전역을 우리의 영토 안으로 넣었다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세종시대 이후부터, 백두산은 비로소 “우리나라 산천의 근원(原)”(문종 1년, 1451년)으로 묘사되기 시작했으며, 조선 시대의 허다한 문인들이 백두산을 ‘겨레의 영산(靈山)’으로 노래했다.

험난했던 영토 개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영토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종의 땅은 비록 단 한 뼘의 땅도 버릴 수 없다”며 세종은 반대하는 현지 주민과 조정 대신들을 설득했다. “큰일을 이루려 할 때 처음에는 비록 순조롭지 못한 일이 생기지만, 후일의 그 성과는 창대할 것”이라고 다독이기도 했다. 반대자들을 다독이면서 설득하는 세종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는 우리 역사의 이정표가 세워질 수 있었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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