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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호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국제법

국제회의 한글 표기에 자부심
높아진 위상과 경제력을 반영
중국은 추격, 국제경쟁은 격화

마라톤을 100m 뛰듯 달리는
글로벌 전쟁터의 한국 기업들
압수수색과 정부 개입에 발목

최근 중국 항저우(杭州)에서 개최된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회의장 앞 모니터에 영문 안내문이 떠 있었는데, 그 위로 회의장의 고유 이름이 한자에 더해 한글로 적혀 있었다. 해외 유명 관광지에 한국어 안내문이 있음을 적잖게 봤지만, 중국의 호텔에 한글이 적혀 있다니!

해외에 갈 때마다 그 지역민들이 우리말 쓰는 걸 들을 때면 높아진 대한민국의 위상을 느끼곤 했다. 그만큼 한국인의 방문이 늘었다는 방증일 것이다. 실제로 한국은행과 통계청 등의 자료를 보면, 1989년 내국인 출국자가 120만 명을 넘은 이후 줄곧 늘어 2008년에는 1200만 명에 이르렀다. 지난해에는 약 2870만 명으로 10년 새 2배 이상으로 늘었는데, 전 국민 2명 중 1명이 1년에 한 번은 해외에 다녀온 셈이다.

1990년대까지는 해외에 나가면 일본인이냐고 묻던 현지인들이 이제는 한국어로 인사를 건네는 수준까지 됐고, 공공시설물과 관광지 안내문에 한글이 병기되는 단계로 발전한 것이다. 어떤 기제가 작동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파고들지 않아도 답은 명료하다. 그 나라를 방문하는 한국 여행객이 늘어나고, 우리나라 여행객이 지불하는 돈이 핵심이다. 지난해 관광객들이 해외여행에서 쓴 돈은 약 320억 달러나 된다. 콧대 높은 중국의 호텔이 한글을 병기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 국민의 경제력·구매력이 높아져 있다. 정부가 나서서 그 나라에 우리말을 표기해 달라고 한들 그들이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면 결코 불가능할 일이다. 해외의 한글 안내문은, 우리 기업들이 죽기 살기로 뛰어다니며 상품을 팔아 일자리를 만들고 높은 임금을 지불한 결과일 뿐이다.

그런데 날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우리 기업이 만든 LCD TV를 사던 중국 기업이 똑같은 TV를 더 싸게 만들어 내고, 우리 기업보다 먼저 전기자동차를 대량으로 저렴하게 만들어 내기에 이른 것이다. 중국에서는 아침마다 공터나 공원에서 많은 주민이 구령에 맞춰 체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로 중장년층인데, 언제부턴가 그들 옆으로 미국 운동용품 업체의 브랜드 옷과 신발로 치장하고 귀에 무선 이어폰을 꽂은 채 조깅하는 청년층의 모습이 쉽게 눈에 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 각국이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경쟁이 심해지고 있다. 긴 잠에 빠져 있던 거대한 중국이 깨어났고, 하려는 의욕과 의지로 빠르게 달리고 있다. 이는 중국에 잽만 날리던 미국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들어 본격적으로 펀치를 날리기 시작한 데서 분명히 읽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은근과 끈기로 대변되는 한민족이 근면과 성실로 이뤄 온 발전과 번영을 되새기고 살려내야 할 엄중한 시기다. 통신 기술의 발달로 전 세계 모든 일을 손안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시기임에도 세계가 돌아가는 톱니바퀴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그 톱니바퀴 중 대한민국의 사이즈가 크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일각도 소홀히 하지 못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글로벌 사회에서 대한민국은 과거를 들여다보는 데 국력을 쏟고 있는 건 아닌지 안타깝다.

세계 각국의 기업은 전쟁 같은 경쟁을 헤쳐나가고 있는데, 한국 기업들은 정부의 지나친 개입과 규제, 그리고 적폐를 앞세운 압수수색에 몸살을 앓고 있다. 정부가 카드 사용 수수료를 낮추도록 되풀이해 요구하고, 지방정부는 직접 카드까지 만들었다. 어떤 기업은 지난해 13차례나 압수수색을 당했음에도, 올 들어 이미 9차례나 압수수색을 당했다. 현재의 국제사회에서 기업은 마라톤 풀코스를 100m 단거리 육상처럼 달려야만 생존할 수 있는 거대한 글로벌 체인 속에 있다. 그들이 잘못한 게 있더라도 눈감아 주라는 게 아니다. 주관적 정의나 공정에 매몰된 정치와 독존적 의협심으로 기업을 죈다면 세계의 어떤 기업도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기업이 위축되고 국제 경쟁에서 밀려나면 국민의 주머니는 홀쭉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말로 반갑게 맞아주던 외국 상인들이 가벼운 지갑의 한국인을 그전처럼 반기고 한글로 우리를 맞아주겠는가. 지난해까지 증가하던 해외 카드 사용액이 올 들어 줄어들고 있다는 보도가 그 징표가 아니길 바란다. 해외에서 한글이 사라지게 된다면 우리의 자부심에 상처를 내고, 자존감을 떨어트리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