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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용 前 외교부 차관

인도적 지원에도 국민 떨떠름
잇단 도발에 분배 투명성 없고
北 무기개발 간접 지원하는 셈

원금 7억 달러 넘는 식량 차관
北 상환 시늉은커녕 아예 무시
어물쩍 넘기면 정부 직무유기

유엔이 북한의 올해 식량 부족이 심각하다고 발표한 후 대북 지원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우리 정부는 식량 지원 방침은 발표했으나, 북한의 최근 미사일 도발로 악화된 국내 여론을 살피면서 저울질하고 있다. 식량 지원을 통해 핵 협상 복원에 나선다는 ‘야심 찬’ 얘기도 나오지만, 북한이 식량 지원을 “부차적이고 시시껄렁”하다고 폄훼하는 만큼 큰 효과는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인도적 지원과 정치적 고려는 구분해야 하고, 인도적 필요성이 있다면 지원을 고려하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도 지금 국민이 대북 지원에 선뜻 찬동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핵·미사일 개발에 매달려 주민들의 삶을 희생시키는 북한 정권의 비도덕적 행태다. 최근 북한이 발사한 단거리미사일 개발 재원의 일부라도 식량 수입에 쓴다면 북한의 식량 사정은 한결 나아질 게 확실하다. 그런데도 가진 돈은 국제사회를 위협하는 무기 개발에 쓰면서 주민들을 먹일 식량은 국제사회에 손을 벌린다.

둘째로, 북한 정권의 핵·미사일 개발이 바로 우리에게 최대의 위협이 된다는 점이다. 최근 발사한 단거리미사일만 해도 최대 사거리가 500㎞로 추정되는데, 바꿔 말하면 대한민국만이 타깃이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대북 지원에 나서는 게 과연 타당한가 하는 질문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자칫하면 핵 무장한 북한의 위협이 두려워 식량을 갖다 바쳤다는 선전거리를 주게 될지도 모른다. 국민의 선의가 굴종의 표시로 둔갑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식량 지원을 제의해도 북한이 수용하지 않을까 봐 정부가 걱정한다는 말도 있는데, 사실이라면 국민의 자존심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 일이다.

셋째로, 북한에 식량을 지원해도 과연 필요한 주민들에게 가는지 확실치 않다는 의심이다. 과거 식량이 군부대로 빼돌려진 사례들을 볼 때 이런 의심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 세계식량계획(WFP)은 감시요원들이 직접 가서 확인하지 못하는 지역에는 식량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엄격한 기준을 지키고 있다. 남북 간 실효성 있는 모니터링 합의가 불가능하다면 행정 비용이 들더라도 국제기구를 통해 지원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

끝으로, 북한이 원금만 7억2000만 달러가 넘는 식량 차관을 전혀 상환하지 않고 있는데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식량을 지원하는 게 맞느냐 하는 점이다. 2000∼2007년 정부는 곡물 260만t을 북한에 지원하고 매년 식량 차관 합의서를 체결했다. 그런데 북한은 50차례가 넘는 우리의 상환 요청에 대해 회답조차 하지 않는다. 북한의 차관 상환 문제를 어물쩍 넘어간다면 납세자인 국민에 대한 정부의 책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다. 또, 북한에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나쁜 신호를 주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점들을 생각하면 사실 북한에 다시 식량을 지원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하지만 올여름 북한의 취약계층이 심각한 식량 부족에 시달릴 가능성이 있다면 동포인 우리가 외면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다고 과거처럼 퍼주기 식으로 지원하는 것은 안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유엔에서는 136만t을 지원하자고 했지만, 국내 일부 전문가는 지원 필수 규모를 30만∼50만t으로 본다. 예를 들어, 유엔은 지난해 북한의 곡물 수확량을 417만t이라고 보지만 농촌진흥청은 455만t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선 우리 정부가 최소 규모, 말하자면 10만t 정도의 식량을 영유아, 임산부 등 취약계층을 위한 긴급 무상원조 형식으로 국제기구를 통해 지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북한 식량 사정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추가 지원 필요성을 판단하는 것이다. 추가 지원에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하나는, 북한 정권에 대해 핵·미사일 놀음에 돈을 쓰지 말고 예년보다 많은 식량을 수입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두 번째는, 북한이 거부하고 있는 식량 차관 상환을 분명히 약속하도록 해야 한다. 북한이 갚겠다는 약속이 없으면 더 이상의 퍼주기는 안 된다.

한·미와 국제사회는 북한의 핵 포기를 끌어내기 위해 최대의 압박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대북(對北) 인도적 지원은 이러한 전략과 상충되는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로 인도적 지원의 필요성이 있다면 인도적 차원에서 다루는 게 맞는다. 문제는, 과거 인도적 지원 때 무너진 원칙들을 다시 세우고 지원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