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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리 화가

내게는 ‘광화문’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시간들이 있었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 광화문이기 때문이다. 막다른 골목 대문 집이던 그리운 우리 집은 도시계획으로 사라진 지 오래지만, 지금도 그 한옥이 꿈속에 나타나곤 한다. 그 그리운 골목길의 풍경이, 비 오는 날이면 서툰 피아노 소리로, 전을 부치는 냄새의 기억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동네 미장원과 예쁜 피아노 교습 선생님 집과 유명한 운명철학관을 지나서 거리로 나서면, 거기서 광화문까지는 어린아이의 걸음으로도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오랜 유학생활 동안 가장 그리운 곳도 광화문이었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충무공 동상이 눈앞에 삼삼했다. 서울에 다니러 와서는 옛집의 터를 찾아 한참을 헤매기도 했는데, 지금 그 자리에는 아파트 건물들이 들어섰다.

광장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난 건 최인훈의 ‘광장’을 읽은 뒤부터인 것 같다. 소설 ‘광장’이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개인의 소중한 자유를 보장받는 동시에, 그 누구도 억울하거나 배고프지 않은 평등한 사회를 향한 고독한 외침이 아닐까? 그곳이 그렇게 도달하기 어려운 이상향이리라는 것도 그 책을 읽던 시절엔 몰랐다. 광장이란, 집으로 비유하면 가족들이 모여 담소하는 넓은 거실이다. 1981년, 첫 유럽 여행길 곳곳에서 만난 광장에서 주눅이 잔뜩 들어 혼자 서 있던 젊은 시절의 자화상이 떠오른다.

참으로 우리에게 평화로운 광장의 기억은 낯설었다. 늘 구호를 외쳐대거나 타도할 대상을 향해 증오의 함성을 드높이는 곳이 광장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시끄러운 광화문광장을 지날 때마다 광장이란 평화로운 휴식을 주는 곳이며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을 받는 곳이란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들곤 한다.

부럽게 느낀 세상의 많은 광장 중에서 내게 처음으로 깊은 인상을 준 곳은, 1990년 여행 자유화가 되자마자 갔던 체코 프라하 구시가지의 ‘바츨라프’ 광장이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의 봄을 외치며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린 곳, 1989년에는 수십만 시민이 광장을 메우며 40년 공산정권의 몰락을 이끌어낸 벨벳혁명이 일어난 뜻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중국 베이징(北京)의 톈안먼(天安門) 광장도 문화대혁명과 두 차례의 톈안먼 사태가 일어나 자유를 외치며 스러져간 수많은 사람의 기억이 새겨진 곳이다. 지금 그 광장들은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이탈리아의 크고 작은 광장들은 볼 때마다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잊히지 않는 곳은 영화 ‘말레나’에서 모니카 벨루치가 뭇 남자들의 시선과 여자들의 시기어린 눈길을 받으며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가던, 시칠리아 시라쿠사의 ‘두오모’ 광장이다. 저녁이 되면 고풍스러운 낮은 불빛 아래 연주자들이 연주를 하고, 가족들과 연인들이 휴식을 취하며 한가로이 거니는 곳…. 서울의 심장 광화문광장은 언제나 그런 휴식을 주게 될까?

과거사는 늘 잘한 일과 잘못한 일들로 뭉뚱그려져 있다. 정치적·사회적 견해를 자유롭게 비판하고 외칠 수 있는 자유로운 광장의 나라를 얼마나 바랐던가? 하지만 그 세월들은 이제쯤 진화해야만 한다. 우리의 광화문광장도 구호와 촛불의 시대를 넘어 평화와 위안과 휴식을 주는, 정치적이지 않은 시민의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곳을 찾는 외국인들도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라고 감탄하는 곳으로.

돌아오라, 광화문광장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