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호식 멜로영화’

허진호 감독은 지난 1998년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로 데뷔하자마자 한국 멜로영화의 거장으로 떠올랐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한 남자와 20대 인생을 막 시작하는 여자의 이야기로, 그들은 서로에 대한 교감은 있지만 연인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일정한 거리를 두다가 끝난다. 한국 최고 멜로영화 반열에 오른 작품이지만 사랑한다는 그 흔한 말도 없다. 그동안 한국 멜로영화의 공식에는 철저하게 위배된 영화다.

한국 멜로장르는 내용과 형식 면에서 전형적인 특징을 가진다. 예기치 않은 우연한 상황이 등장하고 곧이어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 관객의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서사 양식이다. 배우들의 연기와 음악을 통해 관객의 비극적인 정서를 고양한다. 한국 멜로영화는 감정의 과잉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허 감독의 영화는 기존 멜로영화의 관습을 과감히 벗어던진다. 기존의 과잉과 대비되는 절제의 미학은, 진화한 현대적 멜로라는 평을 받는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허진호식 멜로영화’라는 새로운 수식어를 만들어냈다. 그의 작품에서는 기존 멜로영화와 달리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배제돼 있으며 주인공의 유형이 선과 악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우연적이고 운명적인 인과관계도 배제됐다.

이러한 패턴은 2001년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도 볼 수 있다. 그동안 여주인공의 관점으로 서술되던 멜로 공식을 벗고 남주인공의 관점으로 일상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보여준다.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라면 먹고 갈래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는 명대사로 회자되고 있다. 절제된 연출과 섬세한 심리묘사, 현실적이고 일상성에 기댄 대사 때문에 ‘허진호식 멜로’는 아직도 잔잔한 감동을 주며 우리를 매료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