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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지는 꽃잎처럼… 흔들리는 대숲처럼… 사랑은 가더라

기사입력 | 2019-05-17 14:42



영화 ‘봄날은 간다’의 강릉·삼척

봄 지나 여름에 삐걱거린 사랑
영원하리라던 사랑의 생로병사
계절·소리·자연의 변화에 담아

상우와 은수가 만나 사랑 싹튼
대숲 일렁이던 삼척의 신흥사
물·새소리에 마음이 평온해져

파도 소리 녹음한 맹방해수욕장
요동치는 연인들 권태기 보여줘
사라지는 것들의 허망함도 표현


4월이 지나고 5월도 중순이 넘어가면서 봄날이 가고 있다. 봄날은 청춘과 같다고 한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청춘은 하도 빨리 지나가 속절없이 지는 봄날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사랑 또한 영원할 것 같지만 잠시 머물다 가는 얄궂은 봄날과 같다.

계절이 흘러가는 이맘때면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가 생각난다. 지난 2001년 개봉된 영화는 배우들의 연기는 물론 섬세한 연출과 아름다운 음악이 조화를 이룬 수작으로, 봄날이 가는 것처럼 어느새 다가온 사랑이 떠나가는, 우리네 인생 순간을 담백하게 그려냈다. 누구나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을 추억하듯 영화 속 주인공들은 찬란했던 봄날, 그들이 나누었던 사랑을 각자의 방식대로 기억한다.

극 중 주인공 상우(유지태)는 영화 음향효과를 담당하는 사운드 엔지니어로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젊은 시절 상처한 아버지 그리고 고모와 함께 살고 있다. 강릉 라디오 방송국 프로듀서 은수(이영애)는 새로 맡은 프로그램에서 자연의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상우를 찾는다. 겨울 어느 날, 상우와 은수는 첫 대면을 하고 강원도 이곳저곳 녹음작업을 하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진다.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던 밤, 두 사람은 은수의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고, 사랑에 빠진 상우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에게 빨려 들어간다. 그러나 겨울에 만난 그들의 관계는 봄을 지나고 여름을 맞으면서 삐걱거린다. 이혼의 아픔을 갖고 있던 은수에게 결혼을 재촉하는 상우의 사랑은 버겁기만 하다. 점점 멀어져가는 은수에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상우는 묻는다. 그러나 은수는 “헤어져”라는 말뿐이다.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난 은수를 지켜보며 그는 이별의 아픔을 홀로 극복해 간다. 또다시 찾아온 봄, 상우는 떠나간 지난 사랑을 가슴속 추억으로 남긴다.

영화 ‘봄날은 간다’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소소한 이야기지만 허 감독은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 사랑의 생로병사를 계절의 변화와 자연의 소리를 통해 한 편의 영화에 담았다. 전작 ‘8월의 크리스마스’와 같이 일상성에 대한 사실적 표현으로 세트촬영을 하지 않았던 것도 특징이다. 전작이 전라남도 군산을 주된 무대로 삼았다면 영화 ‘봄날은 간다’는 강원 강릉과 속초를 주된 무대로 삼는다.

봄의 끝자락, 영화 ‘봄날은 간다’의 촬영지인 강원도를 찾았다. 영화는 강릉과 삼척에서 촬영됐는데 특히 삼척시 근덕면과 태백시 통리를 잇는 지방도 427번과 삼척에서 강릉으로 이어지는 국도 7번을 이용해 많은 분량이 촬영됐다. 영화 속 대숲에서 일렁이는 바람 소리와 은은하고 청아한 풍경소리를 촬영한 곳은 삼척 신흥사다. 은수와 상우가 처음 만난 곳이자 사랑이 싹트게 된 장소 삼척은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에서 3시간 30분가량 버스를 타고 가면 도착한다.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봄날, 인적 드문 삼척은 아직도 정겨운 시골의 냄새가 풍기는 조용한 마을이다.

신흥사까지 가는 버스는 하루 4번만 운행돼 택시를 잡았다. 신흥사로 행선지를 요청하니 강원도에는 ‘신흥사’라는 이름의 절이 두 곳 있다고 한다. 하나는 강원 영동 북부 속초에 위치하고, 다른 하나는 영동 남부 삼척에 자리 잡고 있단다. 속초에 위치한 신흥사는 비교적 많이 알려진 곳으로 삼국시대(652년 진덕여왕 6년)에 지어진 고찰이다. 속초 신흥사는 향성사, 선정사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오다가 조선 중기에 이르러 ‘신의 계시를 받고 지어진 절’이라는 뜻으로 ‘신흥사(神興寺)’로 자리 잡아 오늘에 이르렀다. 보물 443호 향성사지 삼층석탑과 통일대불 등 속초 신흥사는 번창했던 과거 천 년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어느 정도 규모를 지닌 사찰이다.

반면에 삼척에 있는 신흥사(新興寺)는 비록 속초 신흥사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그만의 충분한 매력을 지닌 특색 있는 절이다. 삼척 신흥사는 신라 민애왕 원년(838년)에 창건돼 지흥사, 광운사, 운흥사 등으로 불려오다 1821년(순조 21년) 신흥사로 이름을 고쳤다. 규모에서 풍겨나오는 위압감보다는 아기자기한 정겨움이 있는 사찰이다. 이러한 매력을 지닌 덕에 삼척 신흥사는 강원도 내 사찰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촬영지로 영화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시골 마을 작은 신흥사에는 오랫동안 찾는 이가 많지 않았는데 영화 ‘봄날은 간다’가 촬영된 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삼척터미널에서 20㎞가량 떨어진 신흥사, 마읍천을 따라가면 대숲소리를 녹음한 촬영지가 보인다. 야트막한 산기슭에 자리 잡은 대나무 숲에 들어섰다. 대숲에서 이는 바람 소리에는 색깔이 있다는데 과연 어떤 소리가 날까 궁금했다. ‘쏴~ 쏴르르 쏴~’. 대나무가 흔들리며 소리를 낸다. 대숲의 아늑함과 그 공간을 채우는 바람 소리. 대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밝은 햇살과 잎과 잎이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인상적이었다. 대나무 숲은 바람이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바람이 잠시 멈춘 순간에도 귀를 기울이면 귀를 녹이는 청명하고 시원한 바람 소리가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사찰의 풍경소리와 눈 내리는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신흥사를 찾은 은수와 상우는 이곳에서 바람의 소리를 들으며 침묵했다. 눈을 감고 바람 소리에 집중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미묘한 파동에 귀 기울여봤다.


영화 속 계곡의 맑은 물이 흐르는 소리는 마읍천 근처 계곡에서 촬영했다. 신흥사 주변을 둘러보면 햇살이 비춰 반짝이며 윤기 나는 새싹과 계곡의 맑은 물소리, 새소리가 마음의 평온과 안정을 찾게 한다. 삼척은 예전에 탄광이 많아 좋은 물을 찾기 어려웠다는데 다행히도 이곳에는 산이 많아 맑은 물을 품고 있다. 맑은 물소리를 녹음할 때 상우는 은수가 허밍으로 부르는 ‘사랑의 기쁨’을 녹음기에 담는다.

삼척의 산자락 밑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신흥사는 국내에 몇 안 남은 목조 사찰로 유명하다. 신흥사의 처마는 직선의 길이가 짧은 것이 특징인데 이는 추운 강원도 산자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빛을 더 많이 받아들이기 위함이라고 한다. 또 하나 유명한 것은 오래 묵은 배롱나무다. 배롱나무(백일홍)의 빈속으로 소나무 씨가 날아와 자라 지금은 한몸이 되어 살고 있다는 바로 그 나무를 찾아 경내로 들어가니 지난해부터 시작된 대웅전의 보수공사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도색작업이 한창이라 안타깝게도 대웅전의 내부와 배롱나무는 볼 수 없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불제자들을 가르치는 설선당(說禪堂)이 있고 우측은 주지스님이 머무는 심검당(尋劍堂)이 있다. 설선당과 심검당은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108호로 지정된 곳이다. 심검이란 지혜의 칼을 찾는다는 뜻으로, 모든 고통의 원인을 지혜로 다스린다는 것이다. 심검당 한쪽에는 허 감독이 다녀갔다는 친필 사인이 걸려있다. 산 내음을 맡으며 사찰 주변을 둘러보니 고즈넉한 분위기에 조용히 사색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대웅전에 들어가는 대신 영화 속 대웅전에서 기도했던 은수를 떠올려 본다. 영화는 상우의 관점에서 진행돼 은수가 무엇을 기도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장면에서 상우는 은수를 향한 사랑이 시작됐음을 알렸다.

설선당에서 상우는 하룻밤을 묵으며 눈 내리는 새벽, 바람의 소리를 녹음한다. 대웅전 처마 끝 청아한 풍경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울 때 은수는 소리 없이 다가와 상우 옆에 앉는다. 그들에게도 사랑은 소리 없이 찾아왔고 어느새 서로에게 사랑이 스며들었다. 20대 순수한 상우는 꿈같은 봄날을 보낸다. 늦은 밤, 보고 싶은 마음에 서울에서 강릉까지 한걸음에 달려온다. 상우는 자신에게 찾아온 봄날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노련한 30대 은수는 사랑의 콩깍지가 떨어지면 비로소 남는 건 현실뿐이라는 사랑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다. 겨울에 만나 시작한 사랑은 봄이 지나면서 떠났다. 또다시 봄이 왔을 때 사랑의 기쁨은 슬픔으로, 상처는 추억으로 남았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얼마나 있을까. 계절이 바뀌듯 사랑 역시 변한다. 영화는 계절의 변화와 함께 사랑의 변화도 보여준다. 늦은 겨울부터 봄까지 사랑의 시작을 보여준다면 여름은 그 사랑이 변해가는 것을 담았다.

영화에서 그들이 녹음한 파도 소리는 삼척 맹방해수욕장에서 촬영했다. 맹방해수욕장은 백사장이 넓고 수심이 얕아 삼척 제1의 해수욕장으로 불린다. 평화롭게 보이는 백사장이지만 동해바다를 대표하는 바다답게 파도는 역동적이다. 신흥사의 대숲소리와 풍경소리가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의 마음을 표현했다면 맹방해수욕장의 거친 파도 소리는 마음에서 멀어지려 요동치는 연인들의 권태기를 보여준다. 사랑과 미움, 그리고 권태의 시간은 지나가면 유행가 속 가사처럼 남는다. 그리고 그때 당시의 유일한 징표는 기억밖에 없다. 치매 걸린 상우의 할머니도 ‘봄날은 간다’를 부르며 바람을 피워 마음 고생시킨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 대신 젊었을 적 좋았던 시절만을 기억한다. 인간은 태어나서 주어진 시간 동안 희로애락을 경험하다가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다. 할머니의 죽음을 통해 계절이 변하듯 인생도 사랑도 모든 것은, 자연의 이치대로 흐른다는 것을 상우는 점차 깨닫게 된다.

20대 청춘에게 다가온 봄은 짧은 만큼 긴 상실감을 준다. 은수는 사랑이 시작될 때 이미 알고 있었다. 사랑의 기쁨은 잠시지만 사랑의 슬픔은 영원할 것을. 또다시 찾아온 봄에 상우는 ‘사랑의 슬픔’이 녹음된 은수의 노래를 지우며 가슴에 묻는다.

영화 ‘봄날은 간다’는 대숲에 부는 바람 소리와 산사의 풍경을 흔드는 바람 소리 그리고 바다에 이는 파도 소리를 통해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허망함, 영원한 사랑은 없고 사랑은 변하기 마련이라는 잔인한 진실을 들려주며 관객들의 가슴을 설레게도 아프게도 했다. 올해도 우리는 꿈같던 봄날을 속절없이 보내고 있다. 봄날처럼 인생은 가고 사랑도 간다.

글·사진 = 양경미

영화평론가

‘봄날은 간다’ 주인공들의 사랑이 시작되는 장소인 강원 삼척 신흥사의 대나무숲. 햇살이 스며드는 가운데 잎과 잎이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인상적이다. 삼척의 산자락 밑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신흥사는 국내에 몇 안 남은 목조 사찰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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