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김종호 논설위원

‘지조(志操)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경기여고 교사에 이어 고려대 교수를 지낸 국문학자로, 박두진·박목월과 함께 청록파로 일컬어지는 시인 조지훈(1920∼1968)이 종합교양잡지 ‘새벽’ 1960년 3월호를 통해 발표한 글 ‘지조론’의 첫 문장이다. 본명이 조동탁인 그는 ‘승무’ ‘완화삼(玩花衫)’ ‘낙화(落花)’ 등 많은 명시를 남긴 문학적 성취뿐 아니라, 올곧은 선비 정신의 표상으로도 추앙받는다.

그의 정신을 이어가는 일에 앞장서온 대표적 인물이 조상호(69) 나남출판사 회장이다. 한국 출판계 원로이면서 문필가이기도 한 조 회장은 조지훈의 선비 정신을 되살리기 위한 의지의 표현으로, 장남의 이름도 지훈으로 지었다. 유신정권에 저항하는 지하신문을 만들었다가 대학에서 제적되기도 했던 조 회장은 우여곡절 끝에 복학·졸업하고, 1979년 설립한 출판사의 사옥 이름도 지훈빌딩이라고 붙였다. ‘조지훈 전집’을 1996년에 발행한 것도, 조지훈의 전공이던 문학과 국학 부문 지훈상(賞)을 2001년 제정해 매년 시상해온 것도 그 연장선이다. 월간 현대문학 1969년 9월호에 시작된 연재가 문화일보 1994년 8월 30일 게재로 대미(大尾)를 이룬 박경리의 대하소설로, 한국 현대문학사의 기념비적 걸작인 ‘토지’ 21권 완간본이 200만 권 넘게 팔린 것도 큰 밑거름이 됐다고 한다. 그때 번 돈은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젊은 학자나 신인 작가의 책을 낼 수 있게도 해줬다고 한다.

경기도 포천에 대규모의 나남수목원도 2008년부터 조성한 그는 출판 40주년을 맞아 그 역정을 담은 회고록 ‘숲에 산다’를 지난 5일 펴내며 이렇게 말했다. “언론출판을 통해, 어떤 권력에도 꺾이지 않고 정의의 강처럼 한국 사회의 밑바닥을 뜨거운 들불처럼 흐르는 어떤 힘의 주체를 그려보고자 했다.” 지훈상 제19회 시상식이 조지훈 기일(忌日)인 오는 17일 열린다. 조 회장을 두고 임병걸 시인이 읊은 시 ‘세상 가장 큰 책’을 조 회장이 묘비명으로 삼겠다고 한 배경도 새삼 되새기게 하는 자리일 것이다. ‘세상을 향해／ 종이 위에 침묵의 말／ 건네던 사람／ 언제부턴가／ 더 큰 침묵의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그는 돌멩이로 모음을 쓰고／ 나뭇가지로 자음을 썼다’ 하고 시작하는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