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호밀밭의 파수꾼’의 저자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전기를 다룬 영화 ‘호밀밭의 반항아’ 중 한 장면. 영국 출신의 할리우드 배우 니컬러스 홀트가 샐린저 역을 맡았다.

■ 윤성은의 스크린 인물학 - ⑩ ‘호밀밭의 반항아’속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주인공 ‘홀든’
비꼬기·자기 합리화 능한 괴짜

반복된 퇴학… 현실 외면 불구
편견·위선없는 사회 갈망하고
과거에의 답습 거부·비전 추구

소설 주인공‘ 홀든’과 닮은 작가
매사에 냉소·반항적 태도 일관

출판에 목맬때부터 중단때까지
작가로서의 20년 삶 집약 소개
소설 성공덕 부·명예 얻었지만
수십년간 은둔 끝까지 출판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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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관심종자 같아요. 인정욕구도 강하고, 그래서 허언증이 있나 봐요. 일단 이야기를 할 때 웃기고 싶은 마음에 조금 과장하거나 확대해서 말하고, 상대방 이야기에 공감하고 싶을 때 ‘나도 그런 일 겪은 적 있어’ 하면서 거짓말할 때가 있어요. 그 후에 너무 괴롭고요.” 작년 서점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백세희의 에세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도서출판 흔, 이하 ‘떡볶이’)의 한 부분이다. 장기간 기분부전장애를 앓아왔던 저자가 자신의 정신과 상담 내용을 글로 정리해 출간했다. 책의 제목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친구가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고 하면 선뜻 따라나서는 작가의 모습에 착안한 것으로, 독자들의 뜨거운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많은 패러디를 양산해내기도 했다. 종종 변덕을 부리고, 늘 타인의 눈치를 살피며, 끊임없이 자신을 질책하는 저자는 오랜만에 필자에게 ‘호밀밭의 파수꾼’(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이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를 소환했다.

‘파수꾼’은 출판 이후 650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이며 우리 청소년들에게도 필독서지만, 혹자에게는 마크 채프먼이 존 레넌을 암살할 때 지니고 있던 책으로 더 각인되어 있을지 모른다. 그편이 소설의 내용보다 훨씬 자극적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파수꾼’은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한 열여섯 살 소년이 사흘간 뉴욕을 전전하는 이야기를 시시콜콜 들려주는데, 홀든 콜필드라는 독창적 캐릭터가 이 소설의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겉보기에 홀든은 비아냥대기, 합리화하기로는 세계문학전집의 인물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괴짜스러운 데가 있지만, 사실은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애정을 갈구하는 십대일 뿐이다. 이야기를 잘 지어내고, 변덕스러우며, 그 가운데 스스로 모순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떡볶이’의 저자와 닮은 데가 있다. 그러나 낮은 자존감을 인지하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백세희 작가와 달리 홀든은 훨씬 미성숙하고 공격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결핍을 드러낸다. 그 때문에 소설 초반부에 홀든은 짜증 나는 캐릭터로 다가오지만, 후반부에 이르면 일종의 페이소스를 불러일으킨다. 매사 투덜거리는 그의 화법에 익숙해진 후에는 겁먹은 한 십대의 눈동자와 고독한 어깨가 눈앞에 그려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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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문학사의 문제적 인물인 만큼 홀든 콜필드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이 나와 있다. 우선, 심리학적 관점에서 그는 뛰어난 작가인 형과 똑똑한 동생들에 대한 열등감을 가진 십대로, 자신을 향한 부모 및 어른들의 부정적인 평가에 고통받고 있다. 홀든이 학교 공부를 소홀히 하고 반복해서 퇴학을 당하는 것은 현실을 외면함으로써 그 고통을 피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는 학교와 교사를 비판하면서 자신이 퇴학당할 수밖에 없게 된 이유를 정당화한다. 열등감을 숨기고 우월감으로 포장한다는 점에서 그는 한층 더 반사회적인 인물이다. 홀든은 아이비리그 학생들에게 이유 없이 적대적인 반면, 지적이지 않은 또래들과는 대화가 어렵다면서 그들을 무시한다. 그가 아무렇게나 내뱉는 것 같은 주변인들에 대한 평가는 작가 특유의 경쾌한 구어체와 속어로 표현되어 있다.

미국의 역사와 연결시켜볼 때 홀든은 더욱 탐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었지만 개인은 보수적 가치관하에 사회순응적 인간으로 길들여지게 된다. 자신에게 부여된 이상적 청소년의 틀을 벗어난 홀든이 도시에서 방황하며 다양한 이들을 마주하게 되는 과정은 작가가 묘사한 그 시대의 청사진과도 같다. 동급생이 홀든에게 작문 숙제를 대신 시키거나 엘리베이터 보이가 그를 속이고 폭행하는 등의 사건들 가운데 홀든은 사회의 불의와 부패를 폭로하는 인물이 되어 있는 것이다.

홀든 콜필드를 저 유명한 허클베리 핀이나 개츠비에 비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부모 세대로부터 답습되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그에 따른 삶에 불만을 표하는 홀든은 새로운 비전을 추구하는 신세대라고 할 수 있다. 결말부에서 그는 유일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동생, ‘피비’를 만나 위안을 얻고, 결국 피비 때문에 집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하게 된다.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잡아주는 거야.”(‘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229페이지)



위와 같이 피비에게 털어놓는 홀든의 속내에는 어린아이들처럼 편견도 위선도 없는 존재들로만 가득 찬 사회, 혹은 개인이 정말 위험할 때만 개입하는 국가에 대한 이상이 엿보인다. 홀든이 자신이 원하던 길을 개척해나가지 못하고 요양소로 간다는 설정 때문에 ‘파수꾼’의 한계를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소설의 결말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홀든 내면의 긍정성과 가능성이다. 이 정도의 희망조차 드러나 있지 않았다면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지, 아니 소설이 출간이나 될 수 있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호밀밭의 반항아’(감독 대니 스트롱, 이후 ‘반항아’)는 ‘파수꾼’의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이야기를 다룬 극영화다. 샐린저는 ‘파수꾼’이 큰 성공을 거둔 이후, 뉴햄프셔 코니시에서 은둔자로 살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계속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1963)를 마지막으로 출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둘러싼 소문들이 전설처럼 떠돈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파인딩 포레스터’(2000)는 베일에 싸인 유명 작가 샐린저를 모델로 한 작품이다. 또한, 쉐인 샐러노 감독의 ‘호밀밭의 파수꾼, 샐린저’(2013)는 샐린저 및 ‘파수꾼’의 영향력과 작가의 사후에 남겨진 의문점들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샐린저 문학에 대한 유명인사들의 찬사는 물론이요, 홀든 콜필드의 사회사적 의미, 유난했던 결벽증의 원인 등이 분석되어 있으나 영화적인 결함도 많고, 무엇보다 은둔자로 남고 싶어 했던 작가의 의지에 위배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확실히 샐린저답지 않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샐린저 다큐임에는 틀림없다.

‘반항아’는 샐린저(니컬러스 홀트)가 출판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절부터 출판을 중단하게 되는 시점까지 약 20년의 세월을 보여준다. 샐린저의 인생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대목이나 가십거리들을 생략하고 담백하게 작가로서의 삶만 조명한 이 영화는 과연 샐린저의 팬들을 위한 작품이라 할 만하다. 홀든 콜필드에게 샐린저 자신의 이야기가 투영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반항아’는 ‘파수꾼’에 나오는 문구를 많이 인용한다. 습작할 때 말고도 일상에서 그가 관객들 혹은 타인에게 던지는 말들, 예를 들어 “‘멋지다’라니, 내가 싫어하는 말이다”라든가 “겨울이 되면 오리들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나요?” 같은 대사는 꽤 친숙하게 다가온다. 또한, 컬럼비아대 위트 베넷(케빈 스페이시) 교수의 첫 수업 시간 신에 잘 드러나듯 매사 냉소적이고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샐린저의 모습도 정확히 홀든과 닮아 있다. 샐린저의 이야기와 소설 사이의 기시감 및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이 ‘반항아’를 감상하는 하나의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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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베넷 교수와의 교류 및 갈등, 유진 오닐의 딸 우나 오닐(조이 도이치)과의 연애담도 삽입되어 있으나 2차 세계대전 참전이라는 끔찍한 경험을 중심에 놓고 있다. 샐린저가 전쟁에서 얻은 트라우마는 걸작을 탄생시키는 데 일조한 반면, 평생 그를 괴롭히며 구속하게 된다. 그래서 ‘반항아’ 속 샐린저는 부와 명예, 가족들을 얻었음에도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가 왜 수십 년 동안이나 은둔하며 출판을 거부했는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궁금하다. 어쩌면 샐린저는 자기의 분신인 홀든이 끝내 지속하지 못했던 반항적 인생을 대신 실천하려 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출판이 전부였던 샐린저에서 출판이 전부가 아니게 된 샐린저로의 변화를 ‘성장’으로 보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행보는 또한, 어린 시절 그를 배신하고 찰리 채플린과 결혼한 우나에게 받은 상처를 완전히 극복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그에게 출판이 중요했던 첫 번째 이유는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샐린저는 언젠가 베넷 교수가 말한 것처럼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할지라도 글쓰기에 전념하는 어떤 ‘순수’의 경지를 앙망했던 것 같다. 이후 그의 소설을 읽을 수 없는 독자들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개인의 행복을 함부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파수꾼’ 기저에 있는 주제라면, 홀든이 자주 쓰는 말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윤성은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