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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픈 인생’ 이겨낸 천재 아티스트, 바다·청춘 닮은 ‘가슴 뛰는 음악’ 낳다

기사입력 | 2019-03-05 10:41


■ 윤성은의 스크린 인물학 - ⑧ ‘러브 앤 머시’의 비치 보이스 리더 브라이언 윌슨

하루키 소설에 빈번하게 등장
서핑 유에스에이·코코모 ‘히트’
서프 뮤직 대표밴드 자리매김

그룹시절 ~ 솔로데뷔까지 다뤄
작곡·프로듀싱·보컬 종횡무진
비틀스의 ‘대항마’로 꼽히기도

1960년대 색다른 앨범 시도
최고의 명반 ‘펫 사운즈’ 탄생
멤버와 불화·환청 시달리기도

1980년대 두번째 부인 만나고
부친 폭행 등 과거의 아픔 극복
37년간 미완성 ‘스마일’ 발표


국내 문학팬들에게 비치 보이스는 음악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밴드로 더 잘 알려져 있을지 모른다. 일례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캘리포니아 걸스’가 들어있는 비치 보이스의 LP는 중요한 소품이고, 일부 가사까지 등장한다. 지난해 여름, 모 라디오 방송에서 하루키가 ‘달릴 때 듣기 좋은 음악’으로 선곡한 12곡 중에도 비치 보이스의 ‘서핑 유에스에이(Surfin’ USA)’와 비치 보이스의 원년 리더였던 브라이언 윌슨의 ‘헤이-호/휘슬 화일 유 워크/요 호(Heigh-Ho/Whistle While You Work/Yo Ho)’가 함께 포함돼 있다. 하루키 소설에서 비치 보이스 음악이 이별이나 죽음을 예고한다는 일각의 분석에 대해서는 좀 더 고찰해 볼 필요가 있겠으나, 음악에 풍부한 식견을 갖춘 세계적 작가가 큰 애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하다.

영화팬들이라면, 톰 크루즈의 눈부신 외모와 뜨거운 해변의 정취가 숨 막히게 잘 어울렸던 작품, ‘칵테일’(로저 도널드슨 감독, 1988) 중 그가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자메이카로 떠나는 장면에서 흘러나왔던 중독성 강한 멜로디의 음악도 기억할 것이다. “아루바, 자메이카, 우 난 당신을 데려가고 싶어요. 버뮤다 바하마 어서 와요 예쁜이”로 시작하는 ‘코코모’는 1961년 결성된 밴드인 비치 보이스의 곡으로 1988년 빌보드 차트 정상을 차지하기도 했을 만큼 큰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이 시기의 비치 보이스에는 브라이언 윌슨이 빠져 있다. 천재적인 작곡가이자 프로듀서로서 자신의 밴드를 비틀스의 유일한 대항마로 만들어 놓았던 그는 오랜 시간 환청에 시달리며 힘들고 고독한 세월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빌 포래드 감독의 ‘러브 앤 머시’(2014)에는 정신적 문제뿐 아니라 심리학 박사 유진 랜디의 통제와 농간으로 고통받던 시절의 브라이언이 잘 담겨 있다.



비틀스에도 존 레넌, 폴 매카트니처럼 특출 난 멤버들이 있었지만, 링고 스타와 조지 해리슨까지 네 명이 함께 팀으로서의 시너지를 창출했다면 비치 보이스에서는 브라이언 윌슨의 역량이 압도적이었다. 브라이언은 작곡, 보컬, 연주, 프로듀싱까지 맡으며 두 동생들(데니스 윌슨, 칼 윌슨)과 사촌(마이크 러브), 친구(알 자딘)로 구성된 밴드를 이끌었다. 그러므로 ‘러브 앤 머시’가 비치 보이스의 성쇠가 아닌, 소년에 머물지 않고 성장하고자 했던 한 아티스트의 열정과 고독을 담는 데 집중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제목을 비치 보이스의 히트곡이 아니라 브라이언의 솔로곡에서 따온 것부터 이 영화의 성격을 알 수 있다.

1960년대 초반, 비치 보이스는 ‘서핑 사파리(Surfin’ Safari)’ ‘서핑 유에스에이’ 등의 앨범을 발표하면서 서프 뮤직(Surf Music)의 대표 밴드로 입지를 다졌다. 1950년대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서프 뮤직은 말 그대로 서퍼들의 문화에서 파생된 것인데, 1년 내내 화창한 미 서부 해안의 날씨와 해변의 들뜬 분위기를 반영하는 음악이다. 코드 진행이나 리듬이 단순해서 따라 부르기 쉽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도 좋기 때문에 비치 보이스의 곡들은 지난 수 세기 동안 ‘여름’ ‘바다’ ‘청춘’ 등의 콘셉트와 어울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흘러나왔다.

그러나 ‘러브 앤 머시’에서 그들이 서프 뮤직을 하며 열광적인 인기와 성공을 누렸던 시기는 영화 초반 3분가량의 몽타주로 짧게 처리된다. 이후 영화는 브라이언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했던 두 시기를 교차하며 보여주는데, 바로 1960년대 중반과 1980년대 중반이다. 폴 다노와 존 큐잭 두 배우가 2인 1역을 맡았음에도 외모나 연기 스타일 등에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브라이언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캐릭터 연구가 선행됐음을 알 수 있다.



1965년, 브라이언은 다른 멤버들이 투어를 하는 동안 집에 남아 새로운 앨범 작업에 몰두한다. 비상한 뮤지션이었던 그는 비치 보이스에 지금껏 명성을 안겨주었던 음악의 범주를 넘어서고자 했다. 여기에는 먼저, 1960년대 전 세계를 열광시켰던 비틀스의 영향이 컸다. 그들의 6번째 스튜디오 앨범, ‘러버 솔(Rubber Soul)’(1965)의 창의성과 사운드에 완전히 매료됐던 브라이언은 비치 보이스도 성장해야 할 때라고 판단하고 다양한 시도를 한다. 그의 이런 결심에 영향을 준 또 다른 인물은 필 스펙터였다. 필은 뛰어난 작곡가였고 ‘테디 베어스’의 멤버로 활약하기도 했지만 무대에 오르는 대신 당대 최고 아티스트들의 음반을 프로듀싱하는 길을 택한다. 그가 만든 필레스 레코드사는 ‘월 오브 사운드(Wall of Sound)’라는 스튜디오 기법을 통해 풍부하고 투명하면서도 균형 잡힌 사운드를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브라이언은 음반 프로듀서의 영향력을 증폭시킨 필을 높이 평가했고, 그 자신도 그런 프로듀서의 역할을 하기 원했는데 이는 ‘러브 앤 머시’에도 분명히 반영돼 있다. 그는 ‘악기로서의 스튜디오(Studio as an instrument)’ 개념에 착안해 대사에도 반영돼 있듯 스튜디오를 연주하고자(playing the studio) 했다. 포래드 감독은 세션들과 함께 음악을 만들어나갈 때의 브라이언에게 가장 큰 활력을 부여함으로써 크리에이터로서 그의 천재성을 부각한다. 공들인 스튜디오 녹음 장면들에는 오래된 필름의 질감, 핸드 헬드 카메라의 흔들림, 롱 테이크, 줌 인·아웃 등을 사용해 오래된 자료화면처럼 리얼리티가 느껴진다.

이렇게 탄생한 록 사상 최초의 콘셉트 앨범(앨범 전체가 하나의 큰 맥락을 갖고 이어지도록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펫 사운즈(Pet Sounds)’는 역사상 최고의 명반 중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 ‘러버 솔’에서 자극을 받아 만든 이 앨범이 비틀스의 또 다른 명반,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트 클럽 밴드(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이하 ‘서전트 페퍼스’)’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폴 매카트니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이 음반에 수록된 ‘갓 온리 노우즈(God Only Knows)’를 누차 언급해 왔으며 ‘펫 사운즈’ 없이는 ‘서전트 페퍼스’도 없었을 것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펫 사운즈’의 실험은 1960년대를 통틀어 가장 혁신적인 노래 중 하나인 ‘굿 바이브레이션(Good Vibration)’까지 이어진다. 구조부터 솔로와 코러스의 역할, 악기 편성까지 줄곧 예측을 뛰어넘으며 전개되는 이 곡에 대해 밥 스탠리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의 정점에서 완벽하게 흠결 없는 사랑 노래였다. 그것은 단연코 1960년대 팝의 어떤 절정이었다.”(‘모던 팝 스토리’, 북라이프)

‘러브 앤 머시’는 이처럼 대단한 음악이 빛을 보기까지 브라이언이 아버지 및 멤버들과 겪었던 갈등을 순차적으로 삽입한다. 3주간의 일본·하와이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멤버에게 브라이언이 들려준 음악은 꽤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칼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 혼란스러움과 불편함을 숨기지 않았는데, 특히 영화에서 그가 마이크와 겪는 갈등은 실제 있었던 일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에 1963년부터 시작된 환청 증세가 점점 더 심해지면서 브라이언은 ‘스마일’ 앨범의 준비를 중단한다. 그렇게 1960년대 후반 브라이언의 상황은 20년 후와 연결된다.


아마도 원래 비치 보이스의 팬이었던 관객이라면 굴지의 뮤지션으로서의 활약이 묘사된 1960년대의 브라이언에게, 그렇지 않은 관객이라면 유년기부터 시작된 불행을 극복해가는 1980년대의 브라이언에게 더 몰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980년대 파트에는 확실한 악역과 함께 그를 물리치는 로맨스가 등장하기 때문에 보다 대중적이다. 중년이 된 브라이언은 유진의 폭력적인 통제 하에 무기력하게 살고 있다. 동생 데니스까지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한 지 얼마 안 돼 상실감이 컸던 이 시기에 그는 훗날 두 번째 아내가 되는 ‘멀린다 레드베터’(엘리자베스 뱅크스)를 만난다. 멀린다가 실제로 카 세일즈를 했었다는 사실과 비치 보이스의 음악이 종종 자동차를 소재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순전히 우연의 일치겠지만, 영화에서는 이를 하나의 내연으로 잘 활용한다. 멀린다의 자동차 판매점은 브라이언과 그녀를 이어주는 공간이자 유진이 패배 직전에 멀린다 앞에서 꼬리를 내리고 사라지는 곳으로, 멀린다의 안정적인 감정과 사랑의 힘을 내포하고 있는 공간이다. 브라이언의 아름다운 저택과 야외 공간에서 끔찍한 폭력이 자행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러나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후 그들은 자동차 판매점이 아닌 도로에서 재회한다. 유진으로부터 벗어나 주체적 삶을 되찾은 브라이언은 멀린다의 차를 막아선 후, 이번에는 첫 만남과 반대로 그가 차에 타고 있는 멀린다를 불러낸다. 그리고 브라이언이 어릴 때 살았던 집이 도로로 바뀌어 있는 장면이 이어지면서 그가 아버지의 폭행으로 얼룩진 유년시절의 트라우마를 넘어서리라는 암시가 깔린다. 그것은 브라이언의 한쪽 귀 청력을 상실하게 만들었고, 그가 겪어왔던 모든 정신적 문제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외상이다.

뮤지션 브라이언과 환자 브라이언, 점점 더 자신 안으로 침전하는 브라이언과 빗장을 열고 밖으로 나오려는 브라이언은 20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고 멀찍이 병존하다가 영화 후반부 초현실적 장면에서 서로를 응시한다. 여기에는 소년 브라이언도 등장한다. 환각이나 환청을 겪는 인물에 관한 영화에서 많이 사용하는 방식이지만, 앞서 100분가량의 러닝타임을 통해 브라이언의 인생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축적된 상태이기 때문에 단순한 클리셰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렇게 과거의 자신과 대면한 후, 그는 비로소 침대를 빠져나와 멀린다를 다시 찾아가고 그녀의 격려와 도움을 받아 창작활동을 이어간다. 2004년, 브라이언은 37년 동안이나 가장 유명한 미완성 앨범으로 남아 있었던 ‘스마일’을 발표했으며, 이 앨범은 두 개의 그래미상을 수상한다.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지금도 그의 활동은 현재진행형이다. 2016년에는 ‘펫 사운즈’ 50주년 기념 앨범이 발매됐으며, 투어도 계속하고 있고 올해는 그의 다큐멘터리도 개봉될 예정이다.

‘러브 앤 머시’는 1988년에 발표한 브라이언 윌슨의 솔로 데뷔 앨범에 실려 있던 곡이다. “사랑과 자비, 오늘 밤은 그게 필요해. 사랑과 자비, 너와 네 친구들에게 바칠게.” 비운의 가수가 아니라 살아있는 팝의 천재로 다시 무대에 서기까지 그에게 끊임없이 필요했던 것도 결국 ‘사랑과 자비’가 아니었을까.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등장하는 브라이언의 연주 실황이 진한 감동을 남긴다.

윤성은 영화평론가 (문예지‘쿨투라’편집위원·‘윤성은의 스크린뮤직’ 팟캐스트 진행)

‘러브 앤 머시’에서 비치 보이스 리더 브라이언 윌슨의 젊은 시절을 연기한 배우 폴 다노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 브라이언 윌슨은 작곡, 보컬, 연주, 프로듀서 등 다방면에 천재적 재능을 보인 뮤지션이었다. 왼쪽 위 사진은 비치 보이스가 1963년 발표한 앨범 ‘서퍼 걸(Surfer Girl)’의 재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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