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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후암과 싸운 ‘마지막 황제’ 작곡가, 삶의 끝에서 또다른 음악을 시작하다

기사입력 | 2019-02-12 10:36

사카모토 류이치가 2017년 미국 뉴욕 맨해튼의 파크 애비뉴 아모리에서 진행된 ‘에이싱크’ 공연에서 피아노 줄을 이용해 연주하고 있다. 사카모토 류이치가 2017년 미국 뉴욕 맨해튼의 파크 애비뉴 아모리에서 진행된 ‘에이싱크’ 공연에서 피아노 줄을 이용해 연주하고 있다.


■ 윤성은의 스크린 인물학 - ⑦ ‘류이치 사카모토 : 코다’의 사카모토 류이치

세계적 뮤지션 겸 사회활동가
소리 천착한 40여년을 다큐로
2017년 ‘남한산성’OST 맡아

쓰나미 때 물에 잠겼던 피아노
조율 않고 연주하는 장면 시작
애잔한 선율·치유 메시지 먹먹

제도권 엘리트 코스 밟았지만
실험적 사운드·퍼포먼스 추구
자신만의 음악세계 확장 선봬

암 판정 뒤 기존 악상 버리고
바흐처럼 ‘코랄 전주곡’ 완성
장중한 맨해튼 연주실황 ‘백미’



당신이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의 이름을 모른다 해도, 아무리 음악과 영화에 대해 무지하다고 주장해도, 각종 미디어에서 종종 흘러나오는 ‘전장의 크리스마스’(오시마 나기사, 1983)나 ‘마지막 황제’(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1987)의 테마곡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최근에도 그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에게 처음으로 오스카상을 안겨주었던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2015)와 2017년 한국영화계 수작 중 한 편인 ‘남한산성’(황동혁)의 음악을 담당한 바 있다. 또한, 작년에는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감독 스티븐 시블, 이하 ‘코다’), ‘류이치 사카모토: 에이싱크’(감독 스티븐 시블, 이하 ‘에이싱크’) 개봉과 더불어 ‘류이치 사카모토: Life, Life’(이하 ‘Life, Life’)라는 타이틀의 전시를 열고,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 영화인상’을 수상하는 등 국내 팬들과의 만남도 잦았다.

대중에게는 주로 영화음악 작곡가(혹은 배우)로 알려져 있지만, 사카모토의 활동은 사실 오래전부터 문화예술계 너머로까지 확장돼 있었다. 2001년 9·11 테러,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등 굵직한 사고가 있을 때마다 그는 시대의 아픔을 껴안고 작품에 녹여내 왔을 뿐 아니라 직접 거리에 나가 목소리를 냈던 아티스트다. 그러므로 수십 년간 축적돼온 사카모토의 작업 중 어느 한 지점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의 관심사와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코다’는 지난 40년간 뮤지션이자 사회활동가로서 사카모토가 걸어온 길을 집약해놓은 다큐멘터리로, 그가 천착하는 다양한 ‘소리’를 들려주는 작품이다. 고작 100분 동안 어떻게 한 인물에 대해 이렇게 많은 것을 알려줄 수 있을까 놀라울 정도로 밀도 있는 구성이 돋보인다.


◇ 쓰나미 피아노와 반동(反動) 정신

‘코다’는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다음 해, 사카모토가 미야기(宮城)현을 방문했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쓰나미가 시커먼 벽의 모양을 하고 밀어닥쳤던 그곳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피아노 한 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 피아노에 대해 이중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영화 초반부에서 사카모토는 피아노 여기저기를 조심스레 만져보고 연주해보더니 ‘익사한 피아노 송장을 연주하는 기분’이었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작업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는 나무에 온갖 인공적인 압력을 가해 만든 악기 소리는 본래 부자연스러운 것이라면서, 쓰나미에 잠겼던 피아노 소리는 자연의 조율을 통해 본래의 사운드로 돌아간 것이기에 ‘굉장히 듣기 좋았다’고 회상한다. 앞서 그는 일본에 엄청난 인명 피해와 후유증을 남긴 대지진으로 인해 반 세기가량 잠잠했던 일본 사회가 원전 반대 운동 등 함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데 의미를 부여한 바 있는데, 망가진 피아노 소리에서도 나름의 예술적 가치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쓰나미 피아노 연주를 자신의 음악에 삽입하면서 흡족해한다. 이처럼 ‘코다’가 보여주는 사회활동가로서 사카모토의 면모는 창작활동과도 직결돼 있는 것으로, 특히 환경에 대한 관심은 오페라 ‘라이프’의 공연실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음악에 강하게 녹아 있다.


사카모토가 동경예술대 작곡과 출신이라는 단편적 사실이나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전장의 크리스마스’ OST), 혹은 ‘레인’(‘마지막 황제’ OST)처럼 멜로디가 강한 음악으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카모토가 실험적인 음악을 해왔다는 사실이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그는 중학생 시절 이미 바흐와 드뷔시에 경도됐지만, 곧 존 케이지와 테리 라일리, 라몬테 영의 음악도 좋아하게 됐다. 따라서 퍼포먼스에 가까운 개념예술은 어릴 때부터 그와 친숙한 것이었고, 그들 음악의 기저에 흐르는 인도 및 아프리카 문화 등 이국적인 요소들 또한 자연스럽게 사카모토의 음악에도 영향을 끼쳤다. 작년 ‘Life, Life’ 전시는 그의 음악과 설치미술의 화학작용을 체험하게 해주는 기회였으며, 2017년 앨범발매기념 공연실황을 담은 다큐, ‘에이싱크’에서도 실험적 사운드와 영상, 퍼포먼스의 조화를 통한 사카모토의 확장된 음악세계를 볼 수 있다.

‘코다’는 또한, 아프리카부터 북극까지 먼 길을 다니며 그 공간의 특별한 소리를 채집할 뿐 아니라 새로운 소리를 개발하고 융합하기도 하는 일종의 발명가로서 사카모토를 충실히 보여준다.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열한 살 때 동경예술대 교수에게 클래식 작곡을 배웠던 그는 제도권에서 소위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인물이지만, 늘 정형적인 것에서 탈피해 미지의 땅을 밟아보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었다. ‘어노니머스(Anonymass, 일본의 음악 유닛)’의 멤버이자 사카모토 음악에 해설을 달았던 야마모토 데쓰야는 그런 그의 성격을 ‘반동’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데, 그것은 사카모토나 그의 음악을 한 단어로 규정지으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서도 작동해왔다.(‘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세계’ 참고, 에스알뮤직) 이것은 그의 타고난 기질과 더불어 선배 음악가들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카모토는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홍시커뮤니케이션)라는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원형이 이미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1960년대 말을 이렇게 회상한다. “서양음악사와 개인사를 교차시키면서 문득 깨닫고 보니 나는 작곡의 현장과 동일한 시간 속에 서 있었다…(중략)…나는 학교나 사회의 제도를 해체하겠다는 운동에 몸을 던졌지만, 동시대의 작곡가들도 기존의 음악 제도나 구조를 극단적인 형태로 해체하려 하고 있었다.” 사카모토의 아트 워크와 액티비즘을 분리할 수 없는 이유를 여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에게 음악과 평화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폭력적인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과 음악을 해방시키는 것은 결국 하나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 바흐, 타르코프스키, 그리고 ‘솔라리’

‘코다’의 타이틀 자막은 영화가 시작된 지 12분이 넘어서야 스크린에 새겨진다. 사카모토가 원전 재해 당시 대피소였던 리쿠젠타카타 중학교를 찾아가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를 연주한 다음이다. 그 애잔하고도 아름다운 선율과 치유의 메시지가 가슴을 먹먹하게 마취시킬 때쯤 타이틀이 뜨고, 영화는 사카모토가 몇 년 후 인후암 3기 진단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2012년부터 ‘코다’를 촬영했는데 2014년에 암 선고를 받았으니 이것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이다. 사카모토는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투병생활에 들어가지만 새 앨범에 대한 구상만큼은 놓지 않는다. 이때부터 ‘코다’의 한 축은 사카모토가 새로운 음악을 완성시켜 나가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이전에 갖고 있던 밑그림을 폐기하고 당장 느끼는 감정, 떠오르는 이미지와 악상에 충실하고자 했던 그에게 계속 맴돌았던 것은 바흐의 음악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였다. 바흐는 뮤지션 사카모토에게 스승 같은 존재고, 1998년에 발표한 ‘BTTB’ 앨범도 바흐의 ‘마태오 수난곡’에서 영감을 받았던 만큼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또한, 감히 ‘성스럽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타르코프스키의 연출작들은 바흐의 음악으로 완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죽음이 가까이 와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거장에게 다시 떠오른 음악이 ‘솔라리스’에 사용된 바흐의 코랄 전주곡이었다는 사실은 다시 주목해볼 만하다. 사카모토는 기도문을 암송하듯 음표 하나하나 그렸던 바흐의 심정을 개인의 고통이 아니라 당시 피폐했던 유럽의 상황과 접목시킨다. 바흐가 전염병과 굶주림, 억압이 있었던 시기에 만들었던 곡을 묵상한 것은 다시 한 번 사회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다지고자 했던 게 아닐까. 정치·사회적 문제를 위해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했던 시기를 떠올리는 장면이 이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므로 코랄 전주곡 이야기가 나오기 이전에 사카모토가 애착을 드러내는 ‘마지막 사랑’(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대사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삶이 무한하다 여긴다. 모든 건 정해진 수만큼 일어난다. 극히 소수에 불과하지만 어린 시절의 오후를 얼마나 더 기억하게 될까. 어떤 오후는 당신의 인생에서 절대 잊지 못할 날일 것이다.”

사카모토는 단지 얼마 남지 않았을지 모르는 개인의 삶을 반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에게 인간의 유한성을 인지시키고 그 절박함을 전달하기 위해 이 대사를 다양한 언어로 콜라주하고자 한다. 그의 박애주의적 행보는 오랜 시간 촬영된 영화에 일관성을 부여해준다. 이런 사고와 연상의 과정을 거쳐 그는 ‘솔라리’를 완성시킨다. 이 곡은 8년 만의 솔로앨범이자 가장 사적인 앨범으로 평가받는 ‘에이싱크’에 수록돼 있다. 사카모토는 2017년 맨해튼 파크 애비뉴 아모리에서 200명의 관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곡을 연주한다. 예배를 드리듯 경건하게 그만의 코랄 전주곡을 연주하는 사카모토와 그의 음악에 푹 빠져든 관객들의 모습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장중하게 연출해낸다. ‘솔라리’는 다큐에 삽입된 수많은 곡 중에서도 단연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도는 신비롭고 정결한 곡이다.

마지막으로, 피아노를 연습하는 사카모토의 모습이 등장한다. 육체적 고통과 싸우면서 원하던 곡을 만들어낸 후, 그는 다시 일상을 시작한다. ‘코다’는 악곡 끝에 덧붙인 부분을 뜻하는 음악용어이면서 그가 1983년에 발표한 앨범의 제목이기도 하다. 큰 인기를 끌었던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관련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다음으로 나아가자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병마를 극복하고 작년에 데뷔 40주년을 맞았던 그는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까. 분명한 것은 그가 자신에게 익숙하고 편안해진 작업들은 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그가 애타게 설파한 대로 삶이 무한하다 여기는 우는 범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새로운 음악을 들을 기회가 우리 모두에게 좀 더 길게 남아 있기를 바란다.

윤성은 영화평론가

(문예지‘쿨투라’편집위원·‘윤성은의 스크린뮤직’ 팟캐스트 진행)

자연에서 소리를 찾는 사카모토 류이치. 사카모토 류이치와 쓰나미 피아노. 윤성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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