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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준 논설위원

2001년 8월 기차를 타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핀란드 헬싱키로 갈 때 이야기다. 핀란드 국경에 도착하자, 핀란드 관리들이 송아지만 한 셰퍼드를 여러 마리 끌고 기차 안으로 들어왔다. 승객 대부분이 러시아인이었는데, 입국 목적을 꼬치꼬치 묻고 짐을 일일이 열어보게 했다. 그리고 셰퍼드가 냄새를 맡은 후에나 입국 도장을 찍어 주는 것이었다. 차례가 돼 여권을 건네자,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오셨나요”라고 한국어로 묻는 것이었다. 너무 반가워서, “한국말도 할 줄 아시네요”라고 한국어로 대답했더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도장을 찍은 뒤 여권을 돌려주는 것이었다. 짐을 열라고 하지도 않았다. 부러워 하던 옆자리 러시아인들의 눈빛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이 핀란드 관리들은 한국어를 할 줄 몰랐다. 몇 마디만 암기했을 뿐이었다. 고려인이나 중앙아시아계 사람들이 한국 여권으로 국경을 넘는 일이 빈발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핀란드인이 아시아인의 얼굴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점을 악용해, 여권 사진도 바꾸지 않고 그냥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고안해 낸 방법이 한국어로 말을 건넨 뒤 반응을 보는 것이다. 한국인은 핀란드인의 한국어 사용에 놀라면서 반가움을 표시하지만, 가짜 한국인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모스크바 암시장에선 한국 여권이 고액에 거래되고 있었다. 팔 때는 미화 3000달러, 살 때는 1만 달러 정도였다. 이에 여권을 판 뒤, 거짓 분실 신고를 내 재발급받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여권을 최근 5년 이내에 3회 이상 혹은 최근 1년 이내에 2회 이상 분실할 경우에는 여권 유효기간을 2년으로 제한하고 있으며, 경찰 조사까지 받게 하고 있다.

이런 기억을 떠올리게 된 것은 대한민국 여권(旅券)지수(HPI)가 세계 2위라는 지난 8일 발표 때문이다. 여권 지수란 무비자 혹은 도착 비자로 여행할 수 있는 국가 수를 말한다. 1위는 190인 일본이고, 2위는 189인 한국과 싱가포르다. 그리고 188인 독일과 프랑스가 3위 그룹이었으며, 덴마크·핀란드·이탈리아·스웨덴이 4위 그룹에 들었다. 중국은 74로 69위이고, 북한은 42로 에티오피아·이란과 함께 96위 그룹이다.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가 시작된 것도 그리 오랜 역사가 아니다. 30년 전인 1989년 1월 1일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