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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환 한국외국어대 정치행정언론대학원장·국제정치학

1969년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괌에서 그의 새로운 대(對)아시아정책인 닉슨독트린을 발표하고, 이듬해 외교교서를 통해 이를 세계에 알렸다. 그 핵심 내용은 향후 베트남전쟁과 같은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피하기 위해 강대국에 의한 핵무기 위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시아 국가들이 내란(內亂)이나 침략에 대해 스스로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한미군 철수 얘기가 나오자 박정희 정부는 한국의 사전 동의 없는 일방적인 주한미군 감축은 한·미 상호방위조약 위반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런데도 1970년 미국 정부는 7사단을 철수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에 1970년대 후반 우리는 안보적 공황 상태를 경험했다. 그 대응 방안은 안보 역량의 압축 성장이었고, 이는 핵무기 개발 시도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미국을 외교적으로 우회해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10·26 사태로 박정희 정부가 종말을 고하고, 이러한 우리의 노력은 이어진 새로운 군사정부에 의해 좌절됐다.

1970년대 후반 프랑스에 대한 한국 정부의 요구가 핵무기 개발 협력이었다면, 2018년 10월 문재인 대통령의 프랑스 방문 목적 중 하나는 대북 제재를 완화하는 데 있어 프랑스의 도움을 얻는 것이었다. 이에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공동회견에서 “(북한이) 실질적 비핵화 조치를 할 때까지 대북 제재를 계속해야 한다”고 현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선을 그었다.

지금 한·미 동맹의 불협화음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줄을 잇고 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서해 5도와 북방한계선(NLL)을 무력화하는 일련의 조치들이 이러한 우려를 더해 가고 있다. 또한, 경제 제재를 담당하는 미국 재무부가 지난 9월 평양공동선언 직후 국내 국책은행 및 시중은행에 대해 대북 제재 준수를 요청했다고 한다. 우리 기업이 ‘세컨더리 보이콧’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한편, 남북관계의 과속을 경고하는 미국 정부의 지적이 거듭되고 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범정부적 5·24 조치 해제 검토’ 발언도 해프닝으로 끝났고,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들 앞에서 한국 정부를 가리키며 “그들은 우리의 승인 없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고 외교적 결례를 무릅쓰고 발언했다. 이런 가운데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17일 “남북관계는 비핵화와 연계되고 한·미의 목소리가 일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조태열 유엔주재 대사는 “남북 철도·도로 연결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 대북 제재 위반 소지가 있을 수 있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조윤제 주미 대사는 “남북관계와 비핵화가 항상 같은 속도로 움직일 순 없다”며 애매한 입장을 보였다.

대북 제재를 놓고 한·미 간에 입장 차이(差異)가 부각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완전한 북한의 비핵화는 한·미 동맹의 견고함 없이는 불가능하다. 비핵화 협상에서 북한의 태도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우리가 독자적으로 취할 수 있는 압박 카드가 있는가. 북한 정권에 신뢰를 보이면 그들도 바뀔 것이라는 사고에 매몰돼 다른 사고를 애써 도외시하는가.

지금 이 순간 답은 분명하다. 한·미 공조 없이 북한의 비핵화는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비핵화 협상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지 모른다. 북한을 변화시키고 주변 강국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데 수많은 외교적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향후 한반도에 ‘핵 없는 평화’냐 ‘핵 있는 평화’냐를 결정할 중대한 시점이다. 더는 확증 없이 외교적 실험을 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