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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이 달

리카(미야자와 리에)의 일상은 지루하다. 그건 남편이 오로지 자기 일에 대해서만 떠들기 좋아하는 이기적이고 답답한 인물이라서만은 아니다. 리카는 은행 창구에서 돈을 관리한다. 매일 들어오고 나가는 종이(리카는 돈을 그렇게 표현한다)를 세고 맞추는 것은 달이 뜨고 지는 것만큼이나 반복적이고 구태의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리카의 유일한 낙은 외근이다. 회사에선 누구도 리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고객들만은 그가 전부다. 그는 은행에 가기 힘든 노인들의 집을 방문해 입금, 적금 등을 처리하는데 업무는 대부분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노인 고객이 속아서 산 ‘아이디어 상품’들이나 차를 산다며 얻어 온 팸플릿을 봐주고 칭찬해주는 일까지 모두 리카의 업무다. 그러나 고객 중 한 명인 히라바야시 영감의 추태만큼은 참기 힘들다. 틈만 나면 가느다란 눈으로 리카의 몸을 훑어대는 이 영감에 대한 방문업무를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때때로 한 번씩 적금과 펀드를 들어 줄 수 있는 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돈과 돈 사이를 오가는 일상의 반복에서 리카는 히라바야시의 손자인 고타(이케마쓰 소스케)와 마주친다. 할아버지에게 돈을 빌리러 왔다가 욕만 호되게 먹고 돌아가는 그는 오히려 노인의 음담패설에 시달렸던 리카에게 괜찮냐고 묻는다.

며칠 후 리카는 은행 근처에서 고타와 우연히 마주친다. 반가워하는 고타는 리카 곁을 맴돌며 좀처럼 떠나려 하지 않는다. 고타의 관심을 피하던 리카는 단념하고 집으로 향하던 고타의 눈앞에 나타난다. 공기인형처럼 늘 누군가의 숨에 반응하고 의존하며 살았던 리카에게 무슨 생각이 들었던 걸까. 그는 고타와 함께 핑크색 조명으로 뒤덮인 싸구려 모텔방으로 들어간다. 고타는 젊은 남자답게 리카를 압도한다. 너무도 힘껏 누르는 통에 숨도 쉬기 힘들지만 리카는 그가 주는 묵직한 중력이 좋다.

이미지 크게보기 김효정 영화평론가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2014년 작 ‘종이 달’(사진)에는 달을 비추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모두 초승달이다. 고타와 밤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리카는 초승달을 바라본다. 가느다란 초승달이 주인공 리카와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찔하도록 예쁘지만, 원을 채우지 못한 초승달은 불완전하고 위험하다. 그렇기에 하룻밤 동안 몇 번이고 그의 심신을 채워준 고타에게 무엇이든 해 주고 싶어진다. 리카는 등록금을 마련하고자 사채 빚에 쫓기고 있는 고타를 돕기 위해 그의 할아버지 히라바야시의 적금을 횡령한다. 히라바야시의 200만 엔(약 2000만 원)으로 시작한 리카의 횡령은 고타에게 고급시계를 사주고, 집을 얻어주는 등의 지출로 이어지며 횡령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결국 10억 원에 이르는 리카의 횡령은 발각되고, 그는 도망친다.

이 영화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점은 미야자와 리에의 변신이다. 열아홉 살에 누드사진집 ‘산타페’를 발표하고, 스모선수와의 파혼 등 이어지는 스캔들로 유명해진 리에는 이 영화에서 깊은 내면 연기를 펼치며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남편과의 대화에서도, 동료들과의 회식에서도 리카는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다. 옳고 그른 것도, 좋고 싫은 것도 선을 그으며 살아 본 적이 없는 리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아를 잃은 것이다. 그런 리카에게 고타가 나타났을 때, 막사는 듯하지만 열정적인 남자 고타가 자신을 만져주었을 때, 리카는 자아를 찾은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고타에 대한 집착과 횡령으로 이어지게 되는 물량공세는 고타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리카의 허구적 자아에 대한 집착인 것이다.

배우 리에가 이렇다 할 작품 한 편 없이 수많은 유명 배우와 염문을 뿌리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려 했던 과거는 이 영화에서 돈의 허상과 실체가 없는 관계에서 자신을 찾으려 했던 리카의 삶과 맞닿아 있다. 리에의 명연기로 그려진 리카의 공허한 시선과 불안한 표정은 리에의 과거 사진과 겹쳐지며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