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에디트 피아프는 언제나 검은 드레스를 입고 노래하기로 유명했다. 영화 ‘라 비 앙 로즈’의 한 장면으로 마리옹 코티야르가 열연했다.

■ 윤성은의 스크린 인물학 - ② ‘라 비 앙 로즈’ 의 에디트 피아프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에게
사랑의 위대함·위로 전했지만
정작 본인은 불우한 유년기와
애정결핍에 남성들 집착한 삶

영화는 남자관계 대부분 생략
선입견 배제에는 성공했으나
감수성 원천도 생략한 아쉬움

표정·자세까지 완벽히 재현한
마리옹 코티야르 연기 경이적

에디트 피아프가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55년이 지났다. 아직도 피아프의 유해가 안장된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에는 그를 추모하는 전 세계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1977년부터는 프랑스 파리 11구에 에디트 피아프 박물관이 개관돼 손님을 맞고 있다. 피아프와 수십 년간 우정을 나누다가 그의 부고를 들은 뒤 몇 시간 만에 숨을 거둔 전방위 예술가 ‘장 콕토’는 이런 말을 남겼다. “피아프 이전에 피아프는 없었고, 피아프 이후에도 피아프는 없을 것이다.” “Non, Rien de rien(아니요, 전혀 아무것도)/ Non, Je Ne Regrette Rien(아니요,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Ni le bien qu’on m’a fait(사람들이 내게 잘해주었던 일도) Ni le mal tout ca m’est bien egal(못 해주었던 일도 모든 것이 마찬가지야).”

이미지 크게보기 피아프의 생전 모습.

영화 ‘파니 핑크’(감독 도리스 되리, 1994)의 첫 장면은 주인공 ‘파니’가 “나도 나를 사랑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한숨짓는 것으로 시작한다. 반복되는 연애와 이별, 그간 만나왔던 남자들을 향한 환멸 섞인 대사와 함께 흐르는 영화의 주제곡이 바로 에디트 피아프의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다. 호전적인 전주만 들어도 중년 여성의 시원한 목소리와 익숙한 멜로디가 바로 연상된다. 48년이라는 길지 않은 생애 동안 오로지 노래와 사랑밖에는 몰랐던, 그러나 그로 인해 온갖 불운과 고통을 겪어야 했던 피아프의 노래는 외로움의 늪에 빠진 서른 살 싱글, 파니의 이야기에 복선 같은 역할을 한다. 이 곡은 또한 ‘인셉션’(감독 크리스토퍼 놀런, 2010)에서도 중요한 시그널로 등장하는데, 꿈 조작단이라고 할 수 있는 ‘코브’ 일행이 세 겹의 꿈속에서 빠져나올 때 각 단계의 ‘킥’을 동기화시키는 시그널로 이 노래가 사용됐다. 꿈결에서조차 흘려듣지 못할 만큼 독보적인 피아프의 음색도 선곡에 주요했겠지만, 꿈에서 현실로, 모험에서 일상으로 돌아오는 교량 역할을 하기에 “Je repars a zero(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거예요)”라고 말하는 이 곡만큼 어울리는 노래도 드물었을 것이다.

에디트 피아프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라 비 앙 로즈’(감독 올리비에 다한, 2007)는 건강이 좋지 못한 피아프가 혼신의 힘을 다해 관객들 앞에서 이 노래를 열창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대중은 병든 그의 말년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주시하고 있었지만 피아프는 숨을 거두기 3년 전 올랭피아 극장에서 이 곡을 발표했고, 올리비에 다한 감독은 그 모습을 영화의 가장 마지막에 재현함으로써 이 노래야말로 자신의 인생에 대한 그의 태도일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영화의 영어 제목이자 국내 제목이기도 한 노래 ‘라 비 앙 로즈(장밋빛 인생)’와 ‘사랑의 찬가’도 에디트 피아프라는 이름과 함께 가장 많이 언급된다.그의 노래들은 대체로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의 애환과 함께 위로와 희망, 사랑의 위대함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기에 전쟁의 공포 및 화마의 후유증으로 지쳐있던 당대의 프랑스인들에게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실제 피아프의 사생활이 장밋빛과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어떤 면에서 음악적 재능 외에 자신의 불행을 초월한 노래를 불러서 더욱 큰 박수와 존경을 받았던 가수였다. 대개 화려한 분위기를 풍겼던 당대의 가수들과 달리 145㎝ 정도의 작은 키에 비쩍 마른 몸, 소박한 검은 드레스, 십자가 목걸이 등 외모에서 일종의 연민을 불러일으켰던 것도 사실이다. 혹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그저 그런 콘셉트나 가식으로 비쳤을지 몰라도 작은 참새처럼 가냘픈 피아프의 노래는 아름다워서 슬펐고, 우렁차서 더 감동적이었다.

그의 불행은 탯줄로부터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리의 곡예사와 삼류가수 사이에서 태어난 ‘에디트 지오바나 가시옹’(본명)은 부모가 제대로 돌보지 못해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했고 영양실조와 결막염을 크게 앓아 실명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는 할머니가 운영하던 매춘업소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다가 커서는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연명하던 중, 한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는다. 그러나 그가 생계를 위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아이는 뇌수막염으로 죽고 만다.

그 후, 죽음과 사고는 무서울 정도로 그를 따라다녔다. 피아프가 거리를 벗어나 무대에 서게 해준 나이트클럽 주인 루이 레플리는 건달들에게 살해를 당했으며, 인생 최고로 사랑했던 마르셀 세르당은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피아프 자신에게는 수차례 교통사고가 있었고, 그 후유증으로 모르핀 중독에 빠진다. 사랑 없이 살 수 없었던 그는 많은 남성과 연애를 했지만, 대개 유부남이었던 그들은 피아프의 돈과 명성을 이용하다가 갈등이 커지면 떠나기를 반복했다.

이미지 크게보기 거리의 곡예사였던 아버지와 노래하는 에디트 피아프(위 사진). 세계 챔피언이었던 마르셀 세르당과 에디트 피아프는 연인이었다(가운데). 병약해진 에디트 피아프와 그를 돌보는 스태프 루이스 바리에르(아래).

전기 작가인 실뱅 레네는 에디트 피아프의 삶을 ‘노래’와 ‘사랑’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하고 이 키워드들에 집중해 그의 전기를 서술한 바 있다. 가수로서 그는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한 여성으로서 그는 대체로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다. 부모와의 온전치 못한 관계로부터 기인한 애정결핍이 그를 늘 남성과의 관계에 집착하게 만들었는데, 피아프의 지인이자 사진작가였던 마르셀 루티에는 “피아프의 뿌리 뽑을 수 없는 가장 큰 비극은 남자를 향한 욕망의 로맨티시즘”이라고 했으며, 레네도 “남자를 향한 미친 듯한 열광과 욕망은 자살의 문턱까지 끌고 가는 그녀 인생의 가장 치명적인 불행이었다”고 말한다. 피아프의 전기에는 마르셀 세르당은 물론이요, 레몽 아소, 폴 모리스, 이브 몽탕, 조르주 무스타키 등의 유명 인사와 첫 번째 남편인 빅토르 뒤코, 두 번째 남편인 테오파니스 랑부카스 등과의 연애담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영화 ‘라 비 앙 로즈’는 마르셀 세르당 이외의 남자관계는 대부분 생략하고 가수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에디트 피아프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에는 인물에 대한 불필요한 선입견을 배제하고, 경제적인 스토리텔링을 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는데, 실뱅 레네의 책에서 엿보이는 가십성 이야기들과 거리를 뒀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하나 조금은 아쉬운 부분도 있다. 예술가로서 피아프의 넘치는 감수성의 원천은 타고난 환경뿐 아니라 연애사와도 밀접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그의 목소리는 기본적으로 사랑의 황홀함부터 이별의 고통까지, 광년의 거리를 헤매며 청중의 심금을 울려왔다. 올리비에 다한 감독은 그를 스쳐 간 많은 남성을 생략하는 대신, 마르셀 세르당의 사고가 그에게 안겨준 거대한 슬픔을 인상적으로 묘사한다.

이미지 크게보기 윤성은 영화평론가

영화는 에디트 피아프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가수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하나의 순행적 스토리를 주축으로 병마와 싸우며 무대에 서는 말년의 모습 등을 교차시키며 진행되는데, 뉴욕 방문기를 다룬 부분에서는 마르셀 세르당과의 만남과 사랑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세르당의 부고를 듣는 신은 140분간의 러닝타임 중 절정부라고 할 수 있는 107분경부터 약 4분30초간의 롱테이크로 처리됐다. 이 장면에 앞선 54분경, 루이 레플리의 죽음을 알게 되는 신도 비슷한 기법으로 촬영됐으나 1분30초 정도에 불과했고 동선도 단순했다는 점에서 중량감이 적다. 반면에 피아프가 세르당의 환상을 보는 장면부터 서서히 그들에게 닥친 비극을 인지, 확인하고 절규하다가 바로 무대로 나가 노래를 부르는 이 초현실주의적인 샷은 ‘라 비 앙 로즈’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카메라는 피아프를 따라 침실, 복도, 주방, 거실, 무대까지 연결된 거대한 세트를 바쁘게 미끄러지며 이 사건이 그의 인생에 남긴 치명적 트라우마를 극적으로 담아낸다. 이 장면 끝에 무대로 나간 피아프는 세르당의 죽음을 애도해 만든 ‘사랑의 찬가’를 부른다. “아무 문제 없는 하늘에서 우리는 영원히 함께 하는 거예요”라는 가사와 웅장하고도 애절한 선율이 그녀의 절절한 마음을 잘 드러내 준다. 이브 몽탕과 함께하던 시절 ‘장밋빛 인생’을 15분 만에 완성시켰던 것처럼, 그는 세르당과의 시간도 예술로 승화시켰다.

‘라 비 앙 로즈’는 피아프가 가수로서 성공하는 데 도움을 준 인물들을 소개하는 데는 비교적 후한 편이다. 다한 감독은 그를 거리에서 건져낸 루이 레플리를 은인으로, 연인이기도 했던 시인 레몽 아소를 혹독한 조련사로 묘사하고 있으며, ‘사랑의 찬가’의 작곡가 마르그리트 모노, ‘아코디언 연주자’의 작곡가 미셸 에메르, ‘후회하지 않아’를 만든 샤를 뒤몽과 미셸 보케어와의 첫 만남도 기록하고 있다.

그녀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던 시기에도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친구들과 스태프들이 주변을 지키는 모습은 의미심장하다. 우정 때문이든 돈 때문이든 그들은 피아프가 다시 노래하기를 바랐고, 거기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 때문에, 마지막 신에서 피아프가 부르는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는 공연장에 모인 관객들 이전에 그를 보좌했던 주변인들의 간절한 바람에 대한 화답이라고 할 수 있다.

에디트 피아프를 스크린에 환생시킨 것은 마리옹 코티야르다. 그는 걸쭉한 목소리, 여장부 같은 말투부터 노래 부를 때의 표정 및 제스처와 구부정한 자세까지 피아프를 놀랍도록 그대로 재현해냈다. 실뱅 레네는 피아프가 샹송 가수 중 유례없이 초라한 외모를 가졌으며 그도 자신의 몸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 콤플렉스 때문에 남성들과의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었음을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그에 반해 치밀한 분장에도 불구하고 코티야르의 아름다움을 숨길 수 없었지만, 우아한 분위기와 미모를 덧입고 스크린 속에서 재탄생한 피아프는 그를 추앙하는 동시대 팬들의 입맛에 더 정확히 맞는 것이었다.

마리옹 코티야르는 이 작품으로 2008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프랑스어로 연기한 배우가 여우주연상을 받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3년 후, 그녀가 ‘인셉션’에서 피아프의 노래와 다시 한 번 인연을 맺게 된 건 그저 우연일까. 그렇다면 정말 기막히게 흥미로운 우연이다.

1960년대 이후 고통에서 우러나는 강렬한 목소리의 시대는 저물고 말랑말랑한 음악이 뮤직홀을 채웠지만 에디트 피아프 사후 30년 동안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은 여전히 그의 것이었다.

세계정세가 요동치던 20세기 중반, 타고난 환경과 불운을 딛고 열과 성을 다해 노래했던 피아프의 영혼은 지금도 그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유럽 작가주의 영화에서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도 그의 노래는 강한 생명력으로 꿈틀댄다. 에디트 피아프는 불멸의 작은 참새이자 프랑스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윤성은 영화평론가 (문예지‘쿨투라’편집위원·‘윤성은의 스크린뮤직’ 팟캐스트 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