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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성 서울대 교수·사회학

1976년으로 기억한다. 필자가 다녔던 서울대 사회대 게시판에 한국고등교육재단 명의의 미국 유학생 선발 공고문이 붙었다. 학비 전액 제공, 생활비 월 500달러, 유학 전 주 2회 영어/방법론 교육, 연구비 월 5만 원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당시 서울대 인문사회계열의 한 학기 등록금이 6만8000원이었는데, 연구비로만 월 5만 원을 지급하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더욱이 한국고등교육재단은 그 엄청난 장학금을 제시하고도 학위 취득 후 책임근무 같은 요구를 전혀 하지 않았다. 믿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한국고등교육재단이 최종현 SK 회장이 사재를 들여 만든 장학재단이라는 사실도 그때야 알았다.

당시는 경제발전이 시대의 공인된 과제였고, 그 목표는 과학과 산업의 진흥으로 달성될 수 있다는 단순 논리가 사회적 정답으로 통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최 회장은 이런 한국 사회의 분위기에서도 사회과학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1976년 한국고등교육재단이 선발한 미국 유학생이 정치학·경제학·사회학 등 사회과학 분야였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도 사회과학 분야 장학금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음을 고려하면 최 회장의 혜안은 시대를 앞서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더 놀라운 사실은 사회과학 분야와 별도로 한문 장학생을 선발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고전들을 해석해 현대사회와 연결하는 다리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물론 한국고등교육재단은 나중에 자연과학·공학·인문학 분야로 선발을 확대했다.

외견상 한국고등교육재단은 유학생들에게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았지만, 필자를 포함한 대다수 유학생은 심리적인 압박감을 받았다. 우리 사회에 대한 깊은 책임감이다. 과학기술을 통한 경제발전을 밑으로부터 떠받치는 탄탄한 사회 기반을 만들라는 요청인 것이다. 명시적이지는 않았지만,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운영과 분위기는 그런 최 회장의 정신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가파른 성장을 하던 SK의 사업을 위해 세계 곳곳을 다니던 중에도 최 회장은 반드시 대학을 최우선으로 찾아가 장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너무나 행복하고 기뻐 보이던 최 회장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인재를 기르는 일을 사업만큼 자랑스러워하던 최 회장의 마음을 우리는 느꼈고, 그것은 우리에게 큰 자부심을 갖게 했다. 귀국한 박사들에게 최 회장은 논문 보고회와 축하연을 열어줬고, 연말 시카고대 동창회에서는 장학생을 최고로 추어올렸다. 이렇게 장학생들은 참으로 귀한 대접을 받으며 책임감을 키웠다. 우리 사회가 빠른 경제발전과 민주화 과정에서도 품위를 유지하고 사람을 귀하게 대하는 풍토를 만드는 데 최 회장의 기여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여학생을 유학 보내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는 말도 꼭 하고 싶다.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중요해질 것이라는 흐름을 내다보신 것이다. 이 같은 선견지명은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선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1기로 선발된 유학생 3명 중 여학생이 한 사람이었고 2기, 3기로 가면서 여학생 수는 점점 늘어났다. 뒤에 자연과학과 공학까지로 유학생 선발 분야를 넓히면서 여학생 비율이 조금 줄어들었지만, 8월 현재 누적 전체 인문사회계열 장학생 397명 중 여성은 38%에 이른다. 이것은 성 평등 구조를 만든 최 회장의 의지였을 것이다.

연구자를 명예롭고 평등하게 대하는 이 파격적인 지원 제도는 장학생들에게 한국 사회에 대한 무한책임을 갖도록 만들었다. 필자 역시 이런 지원을 받으며 한국 사회의 발전과 성 평등을 고민하는 사회학자가 됐고, 오는 26일 최종현 회장 20주기를 앞두고 그 감사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