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크로아티아팀 유니폼을 입고 뛰고 있는 루카 모드리치.

흰색·붉은색 사각형의 패턴
1526년 전투서 사용된 紋章
신생국 아이덴티티 잘 살려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열대야에도 월드컵은 우리에게 시원한 한 잔의 사이다(?)가 돼줬다. 초반 지리멸렬했던 우리 팀 때문에 더 더운 것처럼 느껴졌지만, 마지막 독일전 승리는 3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했다. 축구를 보면 필자는 언제부터인가 작은 나라, 약한 나라, 형편이 어려운 나라들을 응원하게 된다. 인구도 적고, 국토도 좁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약소국이 소위 강대국을 이기는 것을 보면서 ‘을의 반란’ 또는 ‘을의 승리’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소시민인 모양이다.

월드컵 결승에서 프랑스에 패했지만 당당하게 결승에 올라간 크로아티아 팀의 선전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고군분투한 그들의 멋진 유니폼은 아주 세련돼 그들이 약소국이라는 사실을 잊게 했다. 이는 디자인, 시각미술의 힘일 것이다. 매체들은 나이지리아 팀 유니폼이 가장 신선하고 스타일리시하다고 했지만 크로아티아 팀 유니폼이 단연 더 아름답다. 붉은색과 흰색 사각형이 사방 연속으로 체크무늬를 이루며 무한정 퍼져 나가는 크로아티아 팀 유니폼은 1990년 크로아티아 화가이자 그래픽 아티스트인 밀로슬라브 슈테(1936~2005)가 디자인했다. 대개 월드컵 참가선수단의 유니폼은 A사와 N사가 거의 독점 공급하는데 국가를 대표하는 화가가 자국 팀 유니폼을 직접 디자인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크로아티아는 몇 년 전 방송사 여행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졌지만, 그전까진 생소한 나라였다. 1918년 세르비아와 슬로베니아와 함께 유고슬라비아연방이었지만 1980년 연방지도자로 민족적·종교적으로 복잡한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했던 티토(1892~1980)가 세상을 떠나자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신봉하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1941∼2006)가 등장해 유고슬라비아연방이 해체되면서 1991년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세르비아와 전쟁을 치러야 했고 휴전과 전쟁을 반복하다 1998년 잠정적으로 분쟁이 종식된, 인구 500만 명이 안 되는 작은 나라다.

이미지 크게보기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어렵게 나라를 세운 크로아티아는 독립된 나라의 상징인 국기와 화폐 디자인을 슈테에게 맡겼다. 그래서 세상에 나온 것이 크로아티아 국기와 화폐 그리고 축구팀 유니폼과 국영항공사의 CI 등이다. 크로아티아는 어느 발칸국가보다 문화적 자부심이 강한 동시에 디자인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산업과 밀접하게 연결되는 응용미술, 그래픽 분야는 20세기 초부터 유럽의 중심이었다. 따라서 디자인이야말로 신생국가 크로아티아의 정치, 경제, 문화, 문명적 아이덴티티를 짧은 시간 내에 확실하게 세계인의 뇌리에 심어줄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 이를 활용했다.

슈테는 수도인 자그레브의 예술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1970년부터 모교의 교수로 일했다. 1968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 유고슬라비아국가관에 대표작가로 참여해 위대한 장난과 상상력을 보여줬다. 이후 1997년 크로아티아 과학 및 예술아카데미 회원이 됐는데 옵아트(Optical Art·기하학적 형태나 색채의 장력을 이용해 시각적 착각을 다룬 추상미술)에 몰입했다.

그가 만든 유니폼도 붉은색과 흰색 사각형이 기하학적인 패턴으로 번져 나가는 옵아트의 원칙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이 문양은 1526년 헝가리에 속했던 크로아티아가 오스만제국과 싸운 모하치 전투에서 사용된 것이다.

이렇게 그는 현대적인 감각의 디자인을 전통, 역사 속에서 끌어내옴으로써 1991년 독립한 신생국가가 아니라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나라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려 했다. 최선을 다하는 크로아티아 선수들을 보면서 춥고 배고팠던 시절 헝그리 정신으로 악착같이 뛰던, 이제는 사라진(?) 우리 옛 모습이 문득 스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