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지난 4월 진보단체 회원들이 한미군사훈련 중단, 사드 철거 등을 요구하며 반미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 남시욱 화정평화재단 이사장 ‘한국 진보세력 연구’ 증보판

이명박 정부때 촛불 시위
세월호 침몰 박근혜 퇴진
문재인 정권의 탄생 과정
10년간의 정치史 추적

“맹목적 북한 감싸기는 안돼
진정한 보수-진보 협력해야
한국의 운명 손에 쥐고 있는
文정부 진보세력 책임 막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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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보수 지성계의 가장 큰 특징은 게으름이라는 말이 있다. 정치인뿐만 아니라 학자들도 도통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에 책 ‘한국 진보세력 연구’ 개정증보판(청미디어)을 펴낸 남시욱(전 고려대·세종대 석좌교수·사진) 화정평화재단 이사장은 그 예외에 속하는 인물이다. 기자 시절에 한국 정치 현장을 오랫동안 관찰해 온 그는 현역 은퇴 후 학계에서 보수 지성인의 시각으로 한국 사회를 고찰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했다.

그 결과물의 하나가 2005년에 처음 펴내고 2011년에 증보한 역저 ‘한국 보수세력 연구’이다. 그는 여기서 한국의 보수가 지켜야 할 가치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내세우면서, 보수세력이 수구 반동 기득권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서는 자기 혁신을 통해 국민 삶의 질을 위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7년 대선과 2018년 지방선거 결과로 한국 보수 정치 진영이 크게 위축된 현재 상황에서 그 주장의 유효성이 훨씬 더 절실해졌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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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09년 ‘한국 진보세력 연구’를 펴냄으로써 현대사를 지배해 온 이념 지형의 양쪽을 균형적으로 살폈다. 한국의 진보세력이 해방 이후 60여 년 동안 걸어온 발자취를 시대별로 추적해 그들의 인맥, 이념 그리고 활동상을 다뤘다. 그 후 10년, 한국 정치와 이념 세력의 상황이 급변했다. 이번에 펴낸 증보판은 그 변화를 세밀하게 담았다. 17대 대선부터 올해까지 한국 진보세력이 걸어온 길,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서부터 문재인 정부의 출범 이후 1년간을 평가했다.

남 이사장은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하는 것이 최대의 공정성이라는 생각으로 써 봤다”고 했다. 그 공정성에 대해 의문을 품는 이도 분명히 있겠으나, 이념 정향으로 한국 현대 정치사를 총괄한 것은 지성사에 남을 만한 노작이라고 할 것이다.

그의 진단은, 지난 2007년 17대 대선에서 참패한 진보좌파 진영의 혼란에서부터 시작한다. 야당인 대통합민주신당의 ‘새 진보의 길’ 모색, 2008년 총선 참패 후 불거진 노선 싸움, 2010년 지방선거 압승 후 당명 교체, 2012년 문재인 대선 후보의 패배, 대선 후보를 양보한 안철수의 부상 등을 살핀다. 이 시기에 민주노동당 내부에서 벌어진 종북주의 청산 논쟁, 평등파 집단 탈당과 진보신당 창당 등도 다뤘다. 통합진보당의 해산 과정을 역시 자세히 살피는데, 헌법재판소가 판시한 해산 근거를 적시한다. 즉 ‘헌법상 민주적 기본질서 위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사상 배경이 어떤 것인지 설명한다.

이명박 정부에서의 광우병 촛불 시위, 세월호 침몰 사건과 박근혜 퇴진 운동 등을 거쳐 문재인 정권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진보좌파 진영이 어떻게 결집했는지 기록한다. 박 전 대통령 축출의 5단계, 즉 ‘최순실 게이트 언론보도-촛불 시위-국회의 탄핵소추안 결의-헌재의 파면 결정-구속’ 등의 과정을 재검검한다. 그 과정에서 태블릿PC 보도 의혹, 국회와 헌재의 졸속 결정, 언론의 태극기 집회 묵살 등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검찰이 기소한 박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부패 혐의가 재판 과정에서 상당 부분 무혐의가 된 것을 언급한다. 보수 지성인의 시각이 드러나는 대목인데, 그렇다고 해서 보수 정치 지도자였던 박 전 대통령을 무조건 옹호하지 않는다. 국가 통치자이면서도 좌파와의 권력 투쟁에서 밀린 무능, 청와대 참모진을 직언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채운 독선, 권위주의에 빠져 야당과 여론을 무시한 불통, 창조 경제 비전의 실패 등을 적시했다.

저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저서와 각종 발언 등을 분석해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념이 다른 부분이 있다고 판단한다. 노 전 대통령은 보수세력을 싸잡아 비난했으나, 문 대통령은 ‘위장된 보수’가 아닌 ‘진정한 보수’는 진보세력과 양립할 수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여기서 ‘위장’은 이념도 없이 권력만 좇는 것을 말한다. 문 대통령은 자신을 종북 프레임으로 몰아붙이는 것에 강력히 반발해 왔다. 그런 문 대통령이 반미주의가 농후한 논객 리영희를 사사하고, 통일혁명당 학생청년 지도책으로 월남식 공산 통일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복역한 신영복을 존경한다고 공언한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책은 문 정부가 탕평 인사 공약을 어기고 운동권, 친문재인 인사들을 어디에 어떻게 포진시켰는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친노동 경제정책에 대해서 진보와 보수의 시각이 엇갈리고 있는 점을 다루며, 고용 문제가 심각함을 지적하고 있다.

문 정부는 소외된 국민을 보듬겠다는 약속은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소방 인력을 증원하고 여군을 진급시키는 등의 발상은 보수정권 지도자들의 머리로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 전향적 행위이다.

이 책에서 보수 지성인의 시각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표류하는 국가 정체성’이라는 제목 아래 건국절 논란,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결정,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혼란 등을 다루고 있는 점이다. 저자는 문 대통령이 ‘위장된 보수세력’이라는 말을 쓴 것을 빌려서 가짜 진보세력이 안보·통일 문제를 좌우하면 국가적 재앙이 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인간의 존엄성, 민주주의, 자유와 인권, 생명 존중이라는 진보사상 본연의 이상을 저버리고 맹목적인 북 정권 감싸기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북핵 폐기 없는 성급한 관계 개선과 경제 지원은 북핵을 사실상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

나라가 잘되려면 진정한 보수세력과 진정한 진보세력이 협력하고 경쟁해야 한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그런데 2018년 6월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 결과, 정권을 견제할 세력이 없게 됐다. 문 대통령이 이끌고 있는 진보세력이 한국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기 때문에 그 책임의 막중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게 저자의 충언이다.

장재선 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