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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정치부 차장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3일 싱가포르 국빈방문 중 가진 싱가포르 렉처에서 “‘판문점 선언’과 ‘센토사 합의’가 지구상 마지막 냉전을 해체한 합의로 기록될 수 있도록 국제사회와 지속적으로 협력해 나갈 것”이라며 “만약 국제사회 앞에서 (미·북) 정상이 직접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국제사회로부터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발언은 지난 6월 12일 미·북 정상회담 이후 북한의 비핵화와 미국의 체제 보장과 관련한 실무 논의가 지지부진하자 미국과 북한 양측에 대해 합의 이행의 목소리를 높이고 나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재 미·북 간 대화가 난관에 봉착한 것은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과 미·북 정상회담에서 약속한 비핵화와 관련해 어떠한 구체적인 행보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판문점 선언과 센토사 합의를 통한 남북 냉전 해소를 이야기했지만, 북한은 두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비핵화는 철저히 외면한 채 자신들에게 유리하거나 생색내기 좋은 항목들만 지키고 있다. 북한은 판문점 선언에 합의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개성 지역 설치, 이산가족 상봉, 동해선·경의선 철도 현대화 등을 논의하는 문제에는 목소리를 냈다. 한·미 연합훈련인 맥스선더가 적대행위 중단이 담긴 판문점 선언에 어긋난다며 남북 고위급 회담 무기 연기를 통보하는 몽니도 부렸다. 그러나 판문점 선언에 담긴 ‘완전한 비핵화’에는 철저하게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북한은 센토사 합의에 대해서도 똑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미국과 북한은 정상회담에서 △새로운 미·북 관계 수립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미군 전쟁포로 및 행방불명자 유골 발굴·송환에 합의했다. 이 가운데 북한이 목소리를 높이거나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은 미·북 관계 개선과 평화체제, 미군 유골 송환 문제뿐이다. 북한은 미·북 정상회담 이후 한 달 동안 비핵화와 관련한 아무런 조치도 하고 있지 않다. 한·미 양국이 비핵화 대화 유지를 조건으로 한·미 연합훈련까지 중단했지만, 북한은 오히려 강선 우라늄 농축 의심 시설 등 핵·미사일과 관련한 설비를 늘려나가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태도는 판문점 선언이나 센토사 합의 때 이미 많은 국내외 전문가가 우려했던 부분이다. 판문점 선언에는 대북 협력 관련 문제는 구체적 일정이 제시된 반면, 비핵화의 경우 선언적 문구로만 담겼다. 센토사 합의도 그동안 미국이 요구했던 ‘선(先)비핵화 후(後)보상’은 물론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가 빠졌다. 비핵화와 관련한 디테일 부족이 결국 북한이 판문점 선언과 센토사 합의를 악용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 다시금 현실화되고 있는 셈이다. 문 대통령은 비핵화와 종전선언 등을 둘러싼 미·북 갈등을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식의 논쟁”으로 평가했지만, 이는 핵을 한 손에 움켜쥐고 한·미로부터 이득만 최대한 얻어내온 북한의 전략을 간과한 것이다. 비핵화 조치가 없는 북한에 종전 선언부터 안겨주는 것은 닭과 달걀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것과 같은 문제가 아니다. 판문점 선언과 센토사 합의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디테일 속 악마를 더욱더 키워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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