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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불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황금기로 기록된다. 신상옥, 유현목, 김수용, 이만희 등 거장 감독들이 탄생했고, 이들은 한국영화에 예술적 영혼을 불어넣었다. 특히 김수용 감독의 작품은 남녀 관계에서 드러나는 미세하고도 미묘한 심리 변화를 첨예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호평받았다. 소설가 김승옥의 대표작 ‘무진기행’을 영화화한 김 감독의 ‘안개’는 무진을 배경으로 남녀가 한 달 동안 벌이는 로맨스를 그린 작품으로 김수용 특유의 시(詩)적이면서도 모던한 미장센이 포진해 있다. 그러나 뛰어난 영상미와 함께 강렬한 에로티시즘을 표방해 화제가 된 작품은 1967년 개봉한 ‘산불’(사진)이다.

이 영화는 한국 사실주의 희곡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차범석이 쓴 동명 희곡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6·25전쟁 중의 깊은 산속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마을에는 남편이 빨치산에게 잡혀가거나 국군에게 ‘빨갱이’로 오인 받아 처형되는 등 억울한 일로 생과부가 된 여자들만 남아 지긋지긋한 생활고와 싸우고 있다. “남정네 냄새라도 맡아봤으면 좋겠다”고 농담을 주고받는 이들은 꿋꿋하게 딸린 식구들을 먹여 살리며 가장으로 살아간다. 이들 중 한 명인 점례(주증녀)는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젊은 과부다. 점례는 산속에서 나물을 캐던 중 도주 중인 빨치산 규복(신영균)과 마주친다. 놀란 점례가 뒤로 넘어지고 치마가 뒤집히면서 뽀얀 허벅지가 드러난다. 몇 달을 산속에서 은신하던 규복에게 점례의 출현은 기적의 손길이자 놓칠 수 없는 ‘먹잇감’이기도 하다. 규복은 다짜고짜 점례를 대나무 숲으로 끌고 가 치마를 찢고 고여 있던 욕망을 분출한다. 무섭고 급작스럽지만, 점례 또한 그립던 남자의 온기가 짜릿하기만 하다. 일을 치른 후 점례는 규복에게 산속의 은신처를 만들어주고 음식을 갖다 준다. 그들은 그렇게 매일 밤 밀회를 갖는다. 낮에도 점례는 규복 생각에 혼을 놓는다. 절구질하면서도, 빨래하면서도 그가 온몸에 남겨놓은 흔적이 사지를 찌릿하게 한다.

점례에게서 수상한 낌새를 감지한 이웃 사월(도금봉)은 몰래 점례를 미행하고, 결국 이들의 관계는 들통나고 만다. 남편을 잃고 외로웠던 사월은 점례에게 “나눠 갖자”는 제안을 한다. 안 그러면 신고하겠다는 사월이 원망스럽지만, 비밀이 탄로 날까 두려운 점례는 그날 밤 사월을 대신 보낸다. 잠든 규복의 냄새를 맡고 핥아대는 사월은 점례를 겁탈했던 규복보다 더 동물적이다. 화들짝 놀란 규복에게 사월은 저고리를 풀어헤치며 거부하면 신고하겠다고 협박한다. 규복은 내키지 않지만, 사월을 품고 만다. 이렇게 욕망으로 맺어진 이들의 위험천만한 연(緣)이 시작된다.

전쟁의 폐해를 여성의 성에 대한 집착적 욕망으로 그려낸 이 영화는 명동 국립극장에서 개봉 당시 화제를 모으며 기록적인 흥행을 거뒀다. 중심인물 점례와 사월을 비롯해 모든 여성 등장 인물이 전쟁의 패악으로 입은 상처와 결핍을 성적 광기로 씻어내려는 듯 과장된 욕구를 드러낸다. 이들은 틈만 나면 남자에게 안기고 싶은 욕망을 농담 식 푸념으로 쏟아낸다. 무리 지어 산에서 내려오던 아낙들이 버려진 규복의 옷을 우연히 발견하고 번갈아 가슴에 품은 채 “냄새만 맡아도 생기가 도는구먼”이라고 말하며 웃어 젖히는 장면은 코믹하지만 그로테스크하다.

이미지 크게보기 김효정 영화평론가

이 영화에서 주목할 점은 여성 캐릭터들의 뛰어난 심리묘사다. 삼각관계가 시작된 이후 점례와 사월은 서로에 대해 상반된 심리를 보인다. 점례는 사월을 체념과 연민으로 바라보고, 사월은 질투와 불안으로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 간다. ‘사육’당하는데 지친 규복이 사월의 목을 조르며 죽이려 할 때 점례가 뛰어나와 “사람을 사랑하는 게 무슨 죄냐”며 사월을 두둔하는 대목에서는 두 여성의 묘한 연대가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규복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 사월은 자살하고, 규복은 공비를 잡기 위해 국군이 대나무 숲을 태우는 과정에서 죽는다. 가장 가까웠던 두 사람을 동시에 잃은 점례가 절규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전쟁의 상흔에 대해 반추해보게 한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