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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복 소설가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16세에 빈손으로 무작정 상경
온갖 고생하며 죽고 싶은 충동

문학상도 받았지만 고난 계속
내 인생은 원래 불행한가 원망

45세에 기적 같은 내면의 변화
마음가짐 바꾸니 행복하더라

불우한 시절이 있었다. 일찍이 문학에 뜻을 두고 정진했다. 하지만 우선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했다. 농토가 없었다. 논밭이 있었더라면 농사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우리 집에는 송곳 꽂을 땅조차 없었다.

일자리도 마땅치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도 호적 나이가 만 16세밖에 안 되는지라 공무원 취업 등 공민권(公民權)을 행사할 수가 없었다. 취직시험에 응시하려 해도 연령 미달이었다.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집을 나섰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무작정 서울행 완행열차를 탔다. 1970년 6월 5일이었다.

각오는 비장했다. 목표도 분명했다. 작가가 되어 성공하기 전에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리라 작정했다. 완행열차는 하루 종일 철길을 따라 느릿느릿 이동하면서 역(驛)마다 꼬박꼬박 서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구간에서는 특급열차를 먼저 보내느라 가장자리 선로(線路)로 대피하기도 했다.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릴 무렵 낯선 영등포에 첫발을 디뎠다. 역전 일대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빗줄기가 굵어 앞이 보이지 않았다. 번개가 번쩍 눈앞을 베고 지나가면 천둥이 우르르 꽝꽝 지축을 흔들었다.

영등포의 밤은 현란했다. 여기저기 울긋불긋한 네온사인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일단 살아남기 위해 ‘먹여주고 재워주는’ 집에 들어가 잡역(雜役)을 시작했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만났다. 중노동에 골병이 들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실의(失意)와 자학(自虐)이었다. 어린 시절 고향의 어른들은 나를 가리켜 ‘신동(神童)’이라 했고, 특히 학교에 들어간 뒤로는 선생님들까지 ‘수재’니 ‘천재’니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건만 객지에 나와 이토록 밑바닥을 박박 기며 중노동과 사투(死鬪)를 벌이게 되다니 너무나 기가 막혔다.

자존심이 상했다. 피눈물이 흘렀다. 어떤 때는 죽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 험난한 고역(苦役)을 감당하기가 너무 버거웠다. 인생을 비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필자에게는 실낱같은 한 가닥 희망이 있었다. 문학에 대한 꿈이었다. 만약 그 꿈이 아니었다면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 무시무시한 실의와 좌절 속에서도 줄곧 명작을 읽고 나름대로 열심히 습작(習作)하는 가운데 가까스로 최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서울은 냉정했고, 자본주의는 가혹했다. 빈털터리가 자립(自立)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약 2년 동안 살인적인 육체노동에 시달리다가 호적 나이로 만 18세가 되었을 때 어느 잡지사 기자로 신분을 바꾸어 정신노동자가 되었다. 그 당시 잡지사 기자는 배고픈 직업이었다. 하지만 원고지에 기사를 써서 밥벌이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종래보다는 진일보(進一步)한 셈이었다.

특히, 작가와 원고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작가 지망생이 직장에서 매일 원고지에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절호의 기회였다. 필자는 습작을 더욱 가속화했고, 1973년 문화공보부 문예작품 현상모집 장막희곡 입선을 시작으로 1974년 제10회 ‘신동아’ 논픽션 현상공모 당선, 1976년 ‘현대문학’ 소설 초회(初回) 추천, 1977년 ‘현대문학’ 소설 추천 완료, 1979년 ‘월간 독서’ 장편소설 현상모집에 당선했다. 이렇듯 20대의 젊은 나이에 각종 문학 관련 공모(公募)를 석권하면서 고향을 떠나올 때의 꿈을 이루었다.

한편, 이 과정에서 결혼과 함께 아이들을 낳아 길렀다. 연로하신 양가(養家)·생가(生家)의 부모님들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셨다. 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들쭉날쭉 기복(起伏)이 심했다. 20대에서 40대에 이르는 동안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 속에 허우적거렸다. 그동안 집을 장만했고, 끊임없이 원고 청탁이 들어와 작품도 열심히 썼다. 1987년 첫 번째 대통령표창을 비롯하여 1994년 제20회 한국소설문학상(韓國小說文學賞) 등 굵직굵직한 상도 꽤 많이 받았다.

하지만 일일이 형언할 수 없는 이런저런 고난들이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무척 힘들었다. 내 사전에는 애당초 ‘불행’이란 단어만 넘쳐날 뿐 ‘행복’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실지로 필자는 그때 얼굴 한 번 펴고 산 적이 없었다. 오죽하면 그 무렵의 내 사진에서는 웃음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다가 45세 때 신(神)의 축복인 듯 놀라운 ‘기적(奇跡)’이 일어났다. 내면(內面)의 변화였다. 어느 한순간 내 삶이 무척 행복하게 느껴졌다. 나는 분명 행복의 중심에 서 있었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다. 불행을 뛰어넘어 행복으로 치닫는 일생일대의 변곡점(變曲點)이었다. 1995년이었다. 모든 일이 막힘없이 술술 풀렸다. 그해 연말 두 번째 대통령표창과 제14회 조연현문학상(趙演鉉文學賞)을 받았다.

그랬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었다. 문제는 마음가짐이었다. 가족들 건강하고 집안 화목한 데다 주위 사람들이 속속 성공하는 것만 해도 얼마나 큰 행복인가. 생각을 고쳐먹자 자학이 자중자애(自重自愛)로 바뀌었다. 이로써 마침내 저 쓰라린 불행을 떨치고 일어나 한바탕 인생역전(人生逆轉)의 장쾌한 드라마를 연출하면서 진정한 행복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 어디 그뿐인가. 필자는 최근 ‘행복 전도사’를 자처하며 여러 사람에게 행복의 가치와 의미를 널리 전파하는 가운데 더 큰 행복을 예감하고 있다. 이제 내 사전에는 ‘불행’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행복’이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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