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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미진 ㈜수젠텍 대표이사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자문위원

그동안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은 주력산업 성장 및 국가 경쟁력 향상의 원천으로 경제 성장의 버팀목 역할을 해 왔다. 네이처 인덱스에 따른 논문 성과 비교 시 글로벌 9위 수준이고, 스마트폰·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첨단 기술 기반의 제품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성과들은 그간 정부의 지속적인 연구·개발(R&D) 투자 확대와 대학 및 산업 현장 연구자들의 끊임없는 혁신 노력에 기인한다.

그러나 투입과 양적 성과 중심의 R&D 시스템으로 전체 규모는 늘었으나 경쟁력 있는 원천 기술 확보와 시장을 주도할 파괴적 기술 혁신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과학기술이 경제 성장에 미치는 영향력이 더욱 커지는 이 시점에 R&D가 투자 대비 성과가 미흡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기술 혁신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기왕에 추진해오던 추격형 R&D 전략은 더는 효과를 발휘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R&D의 대혁신이 필요한 시기다. 과학기술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장기적 관점의 R&D 혁신의 성공 방정식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나라 R&D의 대혁신을 위해서는 먼저, 기초과학 분야의 R&D 지원에 대한 철학의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2015년 한국을 방문했던 일본과학기술진흥기구(JST)의 하마구치 미치나리(浜口道成) 이사장은 “노벨상 수상은 대규모 연구비보다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연구비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연구자의 자율성 확보, 연구기관의 독립성에 기초한 연구 관리,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연구비 지원 등 기초연구 지원 철학을 바꾸려는 노력이 있어야 성과의 창출로 연결될 수 있다. 일본이 기초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22명이나 배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나라도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연구가 가능하도록 기초연구에 대한 지원철학을 바꿔야 한다. 연구 과제의 성공·실패에 대한 평가에 매몰되기보다는 과정을 존중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연구 문화를 조성해 나가야 한다.

한편, 기업의 혁신 역량을 제고하기 위한 R&D 정책의 변화도 필요하다. 지금까지 기업에 대한 R&D 지원은 공급자 중심의 톱다운(top-down) 방식이 주류였으나, 이젠 정책 대상이자 고객인 기업의 입장에서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 대학 및 출연연의 기초·원천 연구에 대한 투자가 사업화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설계돼야 한다. 연구 방향이 처음부터 상용화를 염두에 두고 진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연구 방향에 부합하는 산업 분야의 투자 및 육성도 병행해 이 분야의 성과가 빠르게 상용화 및 창업으로 연결될 수 있는 기업생태계 조성이 필요하다.

혁신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동안 쌓아온 양적 성장을 바탕으로 질적 성장을 도모하는 퀀텀 점프를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긴 호흡으로 가야 한다. 세계적으로 우수한 논문을 가장 많이 배출하는 하워드휴스의학연구소의 연구 지원 철학 중에는 ‘사람에 대한 지원(people, not project)’ ‘연구 자율성 보장(freedom to explore)’ ‘장기적 관점에서 지원(take the long view)’ 등이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R&D 혁신의 성공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철학이 아닐까.

하나의 기술이 기업의 운명을 가르고 글로벌 산업 지형을 바꾸기도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장을 선도할 이러한 혁신적인 기술이다. ‘추월’과 ‘추락’ 사이의 변곡점에 서 있는 우리 경제가 다시 한 번 대도약 하기 위해서는 R&D 혁신이 반드시 이뤄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