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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 前 駐유엔 대사

문재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후 하루 만에, 그리고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조치 후 불과 몇 시간 만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강수가 나왔다. 점잖지만 은근히 매몰찬 듯한 어조의 공개서한을 통해 미·북 정상회담을 취소한 것이다. 최근 북한 고위관리들이 연이어 발표한 성명 내용에서 나타난 북측의 엄청난 분노와 공공연한 적대감을 취소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회담 개최를 위해 들였던 공을 생각할 때 내면의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란과의 핵 합의까지 파기한 마당에,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자칫 회담이 결렬됨으로써 받게 될 정치적 위험을 계산하고 전격 선수를 쳤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른 시일 내에 완전한 비핵화(CVID)를 이루려는 미국의 입장과 단계적·동시적인 ‘조선반도의 비핵화’라는 북한의 입장 간 거리를 현 단계에선 좁힐 수 없었고, 24일 핵실험장 폐쇄 조치 후 발표한 북한의 성명에 슬쩍 들어 있는 전세계 핵군축 실현이라는 표현과 같이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생각을 미국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북한과의 장래 회담 개최 가능성을 열어 둔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협상 스타일로 볼 때 취소 행위 자체가 고도의 심리적 줄다리기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회담 취소로 인해 지금까지 쌓아온 회담의 모멘텀은 자칫 사라질 수도 있다. 심야에 긴급 NSC 회의를 소집한 문 대통령에겐 당황 이상의 타격과 위기상황이다. 남북 고위급회담이 무기 연기된 상황에서 북한과의 논의 의제가 산적해 있고, 가을 평양 방문 희망도 무산될 수 있는 심각한 상황이며, 그동안 미·북 간 회담 성사를 위해 쏟아놓은 노력이 물거품이 될 처지다.

중국의 역할도 신중히 고려해야 할 요소다. 미국은 김정은이 중국 다롄(大連)에서 시진핑 주석을 만난 뒤에 북한 태도가 강경으로 돌변했음을 주시하며 이번 사태의 배경에 중국이 도사리고 있다고 의심한다. 중국으로선 북핵 문제의 근본원인을 강조하며 미국이 북한의 안보 우려를 해소시킬 것을 주문하면서 한반도에서 자신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확대 행사하려 한다. 북한의 비핵화라는 전략적 목표는 공유하지만 방법론에서 미국과 입장 차이가 큰 현실에서 미·중 간의 갈등이 더 고조될 가능성이 크다.

김정은 입장에서는 그동안 시 주석과의 2차례 정상회담을 통해 든든한 원군을 다시 찾았다는 성취감과 남북 정상회담으로 한국 정부를 어느 정도 미국으로부터 유리시킬 수 있게 됐다는 정치적 수확을 거뒀다고 판단할 수 있다. 최악의 시나리오도 가정해 볼 수 있는 상황에서 북한은 오늘 김계관 부상 명의의 담화를 발표, 비핵화라는 용어 사용은 피한 채 의외로 꼬리를 내리며 유화적인 표현으로 정상회담 재개를 노골적으로 희망했다.

현 상황에서 미국은 북한이 비핵화를 위해 속임수 없는 거래를 하려 한다기보다 제재를 회피하면서 핵보유국 지위를 기정 사실화하려는 도박을 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결론지었다고 본다.

김계관의 발표는 미국에 유리한 ‘협상 전 협상’의 위치를 주었다. 그러나 북한의 완고한 입장이 계속된다면 지난해 하반기의 한반도 상황보다 더 끔찍한 상황에 돌입할 수도 있다. 안보 비상 시국이다. 정부는 당분간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욕심에서 눈을 잠시 떼고 비핵화의 명확한 목표를 향해 미국과의 동맹 공조와 중국과의 긴밀한 협조 체제를 총동원해 긴장 고조를 막고 미·북 정상회담이 재개될 수 있도록 외교력을 발휘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