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미국 워싱턴 기념탑이 보이는 내셔널 몰(왼쪽)과 일본의 오사카성. 1894∼1902년을 배경으로 하는 ‘혈의 누’에서 주인공 옥련은 일본 오사카를 거쳐 미국 워싱턴으로 유학을 떠난다. 이인직은 옥련의 기나긴 여정을 통해 만국공법을 따르는 문명의 도래를 꿈꾼 것으로 보인다.

이인직 ‘혈의 누’의 배경 미국·일본

청일전쟁으로 부모 잃은 옥련 日 군의관 도움으로 학업시작 美 유학길에 올라 가족과 재회 ‘대륙횡단’ 국제적 스케일 소설 중화질서 대비‘만국공법’기준 문명·야만 이분화된 세계 그려 韓·美·日 집의 높이·인성까지 문명의 고도로 위계화돼 표출 전근대-근대 사이에 선 이인직 문명 향한 경주마식 질주 선택 과거 혐오·새것에의 동경으로 ‘亡國’ 민족의 피눈물은 외면해

최초의 신소설로 일컬어지는 이인직의 ‘혈의 누’는 상편(만세보·1906년 7월 22일∼10월 10일)과 하편(제국신문·1907년 5월 17일∼6월 1일)으로 이루어져 있다. 청일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옥련이 일본군 군의관인 이노우에(井上)의 도움으로 일본 오사카(大阪)에 가 심상소학교(오늘날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구완서를 만나 미국 워싱턴으로 유학을 가며, 마지막에 워싱턴에서 모든 가족이 재회하는 이야기다. 옥련의 여로는 평양-인천-오사카-이바라키(茨木)-요코하마(橫濱)-샌프란시스코(桑港)-워싱턴(華盛頓)으로 이어진다. 하편에 등장하는 “태평양에서 불던 바람이 북아메리카로 들이치면서 화성돈 어느 공원에서 단풍 구경을 하던 한국 여학생 옥련이가 재채기를 한다”는 문장처럼, ‘혈의 누’는 아시아와 북아메리카를 한데 아우르는 국제적 스케일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1894년부터 1902년까지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소설에서, 주인공이 미국 유학을 떠난다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은 생각보다 일찍부터 우리의 삶에 가까이 있었다. 미국은 서구 국가 중 가장 먼저 우리와 조약을 체결(1882년)한 국가이며, 19세기 말에는 이미 여러 명의 미국 선교사가 국내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최초의 미국 유학생은 1883년에 미국으로 건너간 변수와 유길준이며, 1884년과 1890년 사이에 미국 유학생은 이미 6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혈의 누’가 쓰인 1907년경에는 미국 유학생이 130여 명이었으며, 그 가운데 6명은 대학생이었다. 개화기에 이미 미국은 주요한 국가로서 우리들의 삶 속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이 무렵 미국 유학을 다룬 신소설은 적지 않게 창작됐다. 최근의 한반도 정세와 한·미 관계를 염두에 두고 1세기도 더 이전에 나온 ‘혈의 누’를 읽어보면 매우 흥미롭다.

‘혈의 누’의 작가 이인직은 말이 필요 없는 천하의 친일파다. 그는 일찌감치 일본에 유학한 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통역으로 종군했고 한일강제병합조약 체결 당시에는 이완용의 비서 역할을 수행했다. 일본인 처를 두고 장례식마저 일본종교 예식에 맞춰 치른 그는 진심으로 일본을 믿고 따랐던 인물이다. 그렇다고 그의 대표작인 ‘혈의 누’를 “청국에의 증오와 일본에의 편향성”이나 “애국계몽기의 친일문학”과 같은 친일의 단색으로만 칠해버리는 것은 작품에 대한 과소진술일 수 있다. 이인직이 숭배하고 따른 것은 일본뿐만이 아니라 강하고 부유한 세계 일반이기 때문이다.

기존 논의에서는 친일을 강조하기 위해서 작품 속에 나타난 친일배청(親日排淸)의 태도를 강조하고는 했다. 그러나 친일배청의 태도 이면에는 만국공법(萬國公法)을 기준으로 한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이 매우 강력한 힘으로 존재한다. 만국공법이란 국민국가(nation-state) 사이의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근대적인 국제법을 의미한다. 이것은 천자가 직접 다스리는 중원(中原)과 천자가 책봉한 왕들이 다스리는 12개의 조공국을 설정하는 전근대적 중화 질서와는 대비되는 근대적 세계 질서를 상징한다. ‘혈의 누’에서 일본은 만국공법을 따르는 문명의 세계이고, 청은 만국공법을 모르는 야만의 세계에 속한다. 이인직은 작품 속에서 집요할 정도로 이러한 대비를 반복해서 강조한다.

첫 번째로 청나라 군사는 산에 가서 젊은 부녀를 보면 겁탈하고 돈이 있으면 빼앗아 가는 것과 달리 일본군은 사람들이 피란 가서 비어 있는 집에만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된다. 전장에서 피란 가고 사람 없는 집에 “까마귀떼 다니듯이” 함부로 들어가 물건을 가져오는 행위도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일본군의 행위는 어디까지나 만국공법의 하위법인 ‘전시국제공법(戰時國際公法)’에 따른 것으로 정당화된다.

다음으로 옥련이가 왼쪽 다리에 맞은 총알이 청인의 것이었다면 독한 약이 묻어 있어 죽었을 것인데, 일인의 철환이라 치료하기 쉽다는 대목을 들 수 있다. 이인직이 단순하게 청인을 악마화하고 일인을 이상화하려는 목적이었다면, 옥련이 일인의 총알이 아닌 청인의 총알에 맞은 것으로 설정하는 것이 더욱 나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독약 묻은 청인의 철환을 등장시킨 이유도 전시국제공법과 관련된다. 전시국제공법의 가해수단제한이라는 항목에는 “독 또는 독을 바른 병기의 사용을 금지한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 크게보기 미국 샌프란시스코 피셔맨스 워프.

마지막으로 이노우에 군의관이 청나라와의 요동전투에서 전사하는 장면을 들 수 있다. ‘대판매일신문’ 호외에는 이노우에 군의관이 요동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실려 있다. 이것을 보고 집에서 일하는 일본인 설자는 “만국공법에, 전시에서 적십자기(赤十字旗) 세운 데는 위태치 아니하다더니 영감께서는 군의시언마는 돌아가셨으니 웬일이오니까”라고 말한다. 위의 세 장면은 모두 만국공법의 세계와는 무관한 야만으로서의 청나라와 만국공법의 세계에 속한 문명으로서의 일본이라는 이분법을 보여준다.

이처럼 이인직이 숭배한 것은 일본이라는 개별국가가 아니라 만국공법을 따르는 문명이었으며, 그가 배척한 것은 청이 아니라 만국공법을 따르지 않는 야만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청인이라고 하더라도 문명의 세계에 동참할 때는 결코 야만의 대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옥련과 구완서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청국 개혁당의 유명인사인 캉유웨이(康有爲)와 일어를 잘하는 청인의 도움으로 “화성돈에 가서 청인 학도들과 같이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게 된다. 이때의 청인은 야만과는 거리가 먼 은인에 가까운 모습이다.

조선, 일본, 미국이라는 공간도 문명이라는 기준에 따라 철저하게 위계화돼 있다. 처음으로 문명의 모습이 등장하는 것은 오사카에 도착했을 때다. “항구에는 배 돛대가 삼대 들어서듯 하고, 저잣거리에는 이층 삼층집이 구름 속에 들어간 듯하다”고 묘사된다. 이후 화륜선을 타고 3주일 만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사오층 되는 높은 집은 구름 속 하늘 밑에 닿”을 듯하다. 흥미로운 것은 오사카 항구의 집들이나 이바라키에서 구완서의 정신을 황홀하게 했던 여인숙이 고작 삼층집이었지만, 샌프란시스코의 집들은 사오층 높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옥련 모가 사는 평양성의 집들은 “게딱지같이 낮은 집”으로 묘사된다. ‘게딱지같이 낮은 집(조선) - 이층 삼층집(일본) -사오층 되는 집(미국)’이라는 집의 높이는 각 나라가 보여주는 문명의 고도에 그대로 연결되는 것이다.

조선과 일본 그리고 미국에 사는 사람들도 문명의 정도에 따라 성격화된다. 문명과 가장 거리가 먼 조선인들은, 미국에서 선진 문명을 배우는 옥련, 구완서, 김관일 등을 제외하고는 부정적인 모습 일색이다. 조선인 농민은 불쌍한 옥련 모를 겁탈하려 하고, 대동강에 몸을 던진 옥련 모를 구한 고장팔과 사공은 노름중독자이며, 장팔 어미는 까마귀에 얽힌 미신에 마음이 상해서는 우체부에게 까닭 없이 분풀이나 한다. 문명의 척도로 볼 때, 미국인과 조선인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일본인들은 긍정적인 모습과 부정적인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다. 옥련 모가 겁탈당할 위기에 처하자 일본 보초병이 구해주고, 고아가 된 옥련이를 이노우에 군의관이 구원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노우에 군의관의 부인은 남편이 죽고 옥련으로 인해 재혼이 어려워지자 옥련을 모질게 학대한다.

이와 달리 미국인으로는 오직 호인만이 등장한다. 미국인 중에서 유일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옥련이 머무는 호텔의 보이다. 호텔의 보이는 옥련에게 아버지 김관일의 광고를 알려주었기에 상금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금은 원치 아니하나 귀양(貴孃)을 배행하여 가서 부녀 서로 만나 기뻐하시는 모양 보았으면 나도 이 호텔에서 몇 해 간 귀양을 모시고 있던 정분에 귀양을 따라 기뻐하고자 합니다”라고 정중하게 말한다. 이처럼 미국인은 “도덕심이 배가 툭 처지도록 들”어 있는 문명인인 것이다.

‘혈의 누’에서 미국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천조국이다. 옥련의 현실적 불우와 결핍은 미국에서 모두 해결된다. 만만치 않은 재력과 평등한 여성관을 가진 구완서라는 약혼자 덕택에 옥련은 부족함 없이 공부하고, 헤어진 부모는 물론이고 외할아버지와도 재회한다. 그러나 ‘심청전’에 나오는 용궁처럼, ‘혈의 누’의 미국은 구체적인 삶의 시공과는 거리가 먼 추상적 공간일 뿐이다. 옥련이가 생활하는 워싱턴의 모든 곳은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만 존재한다. 모든 공간은 호텔, 학교, 거리라고 막연하게 불릴 뿐, 구체적인 고유명으로는 단 한 번도 불리지 않는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막연함은, 전공도 알 수 없이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할 뿐인 구완서와 옥련의 이상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구완서는 귀국한 후에 “우리나라를 독일국(獨逸國)같이 연방도를 삼되, 일본과 만주를 한데 합하여 문명한 강국을 만들고자 하는” 꿈을 꾼다. 조선의 독립도 지키기 어려운 마당에 일본과 만주를 한데 합해 문명한 강국을 만들겠다는 망상을 키우는 것이다. 구완서의 망상보다 강도는 약하지만, 허황되기는 “우리나라 부인의 지식을 넓혀서 남자에게 압제받지 말고 남자와 동등 권리를 찾게” 한다는 옥련의 이상도 마찬가지다. ‘혈의 누’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모란봉’(매일신보·1913년 2월 5일~6월 3일)에서 귀국한 옥련의 무력함과 그녀가 겪는 온갖 중상모략 등은 옥련의 꿈이 조선의 현실과는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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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의 누’가 1894년의 청일전쟁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일본의 승리라는 청일전쟁의 결과는 중화질서라는 오랜 유교적 세계관의 붕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글도 모르고 부모도 잃어버린 일곱 살의 어린 옥련이 그러했듯이, 바야흐로 우리 민족도 익숙한 과거의 세계와 결별한 채 광야에 내동댕이쳐진 것이다. 이 역사적 순간 이인직이 선택한 것은 옥련이 그러했듯이, 근대를 향해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의 질주 속에는 오래된 것에의 혐오와 새로운 것에의 동경만 있었을 뿐, 새로운 것이 지닌 어둠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그러나 강하고 부유한 새것만을 좇은 결과는 구한말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만났을 때 친일과 망국이라는 비극을 낳았을 뿐이다.

이인직이 그토록 지향한 만국공법과 문명의 세계는 결국 제국을 대체한 제국주의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까? 실제로 ‘혈의 누’가 창작되기 1년 전에 미국은 이미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 7월)을 체결해 필리핀을 자신이 통치하는 조건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한 바 있다. 결국 이인직은 맹목적인 문명개화의 의지를 통해 옥련의 피눈물(血의 淚)을 닦아줄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그 이후로 반세기 가까이 흘려야만 했던 우리 민족의 피눈물은 외면했던 것이다.

이경재 문학평론가·

숭실대 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