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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운 논설위원

1990년대 외무부(현 외교부)에는 ‘명(名) 대변인’이 많았다.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 장기호 전 캐나다 대사, 이규형 전 주중대사 등이 대표적인데, 정의용 현 청와대 안보실장도 첫손가락에 꼽혔다. 기자들과의 ‘소통’을 워낙 중요시하다 보니 대변인실 예산이 늘 빠듯했다고 한다.

1971년 외무고시 5회로 입부한 정 실장은 일찌감치 통상과 다자외교 쪽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다 보니 외무부 ‘주류’로 간주되던 미국 관련 정무 부서에는 근무하지 못했다. 워싱턴 주미대사관에서도 경제 담당 공사를 맡았다. 서울고,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해군장교로 복무한 정 실장은 정치색이 별로 없다. 굳이 따지자면, 진보보다는 보수 쪽에 가까울 수도 있다. 그러나 2004년 열린우리당 비례대표로 1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진보 진영의 대표 외교통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정 실장이 문재인 정부의 초대 청와대 안보실장으로 임명됐을 때 외교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1946년생으로 고령인 데다, 10년 동안 현업에서 떨어져 있었고, 미국과 북한을 상대로 한 핵(核) 협상 경험이 없으며, 문 정부 핵심 세력들과 ‘코드’가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대화가 시작되고 정 실장이 관련국 정상 간의 ‘메신저’ 역할을 맡게 되면서 새삼 그의 역할이 주목받고 있다. 정 실장은 문 대통령의 특사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난 데 이어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중국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등에게 직접 평양 방문 결과를 설명했다. 북·미·중 정상을 일주일 사이에 면담하면서 정 실장을 ‘키신저’에 비유하는 보도까지 나왔다.

한국 외교관이 국내외에서 각광받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지금부터가 문제다. 정 실장은 김정은이 비핵화 의지를 밝혔다고 세상에 알렸지만, 정작 북한에서는 아무런 발표도 없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정 실장이 김정은의 발언을 너무 ‘적극적’으로 해석했거나, 북한의 태도 돌변 가능성에 충분히 대비하지 않았다는 우려가 나온다. ‘중매’에 성공하려면 양측을 오가며 좋은 말도 해야 할 것이다. 성공하면 술이 석 잔, 그러나 자칫 어그러지면 뺨이 석 대다. 만약의 경우, 모든 책임과 비난의 화살이 정 실장에게 집중되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기우(杞憂)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