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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없이 몸으로 살아온 男女…쓸쓸한 영혼들의 재즈같은 사랑

기사입력 | 2018-03-13 11:08


■ 사랑의 행로

피아노를 치는 남자는 로맨틱하다. 피아노를 치는 형제는 동화에 가깝다. 스티브 클로브스 감독의 1989년 작 ‘사랑의 행로’(사진)는 미국 시애틀 삼류 재즈바를 전전하며 ‘유랑’하는 형제 피아니스트 베이커보이즈와 그들과 합류하게 되는 콜걸 출신의 신인 가수 수지(미셸 파이퍼)의 이야기를 그렸다.

프로로 데뷔한 지 15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형제의 커리어는 고군분투에 가깝다. 형 프랭크(보 브리지스)는 매 공연 전에 화장실 구석에서 흑채를 뿌려가며 사장의 비위를 맞추고, 자존심만 세서 충돌을 끼고 사는 동생 잭(제프 브리지스)은 아파트 월세를 내기도 힘들다. 설상가상으로 공연하던 바에서 해고되자 형제는 궁여지책으로 여성 싱어를 영입하기로 한다. 재앙에 가까운 오디션을 끝내고 낙담한 형제 앞에, 뛰어오다가 구두 굽이 부러졌다며 욕을 퍼붓는 수지가 나타난다. 싸구려 옷을 걸치고 연신 껌을 씹어대는 여자지만 그가 ‘모어 댄 유 노(More than you know)’를 부르는 순간, 형제의 눈이 시계추처럼 맞부딪힌다. 베이커보이즈가 15년 만에 그들만의 뮤즈를 찾아낸 것이다.

무대에 선 수지는 여전히 싸구려 드레스와 액세서리를 휘감고 있지만 금발 머리와 에메랄드빛 눈은 재즈바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인공조명보다 더 찬란하게 빛난다. 물감보다 더 붉은 립스틱 사이로 뿜어나오는 그의 노래는 바에 있는 손님들뿐 아니라 잭의 마음까지도 헤집어 놓는다.

수지의 활약으로 베이커보이즈는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인기와 호사를 누리게 된다. 싸구려 어항이 놓인 동네 술집에서 공연하던 이들이 일류 리조트로부터 넘치는 섭외 콜을 받으며 함께 있는 날이 많아지면서 잭은 점점 더 수지에게 빠져든다. 문제는 수지다. 거리의 여자로 살아왔던 수지는 이 위태로운 남자에게 빠져서 간신히 시작한 새로운 삶을 망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원칙도, 타이밍도 무시하고 파고드는 것이 사랑 아닌가. 화려한 송년 공연을 마치고 녹초가 된 잭과 수지는 빈 무대의 피아노 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처음으로 관객이 아닌 서로를 바라본다. 지친 여자의 머리를, 등을 쓰다듬어 주던 잭은 누르고 있던 마음을 한 번에 쏟아내듯 입을 맞춘다. 곧 수지의 마른 몸에 걸려 있던 홑겹의 새빨간 드레스가 잭의 손에 밀려 피아노 밑으로 내려간다. 잭의 황홀한 피아노 연주에 홀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수지는 그의 손길을 더 이상 뿌리칠 재간이 없다.

우습게도 그렇게 새해의 첫날 새벽을 애틋하게 보내고 난 남녀의 겉과 속은 너무 다르다. 서로가 간절하지만, 평생을 여자의 몸에서 몸으로 옮겨 다니며 공허한 일상을 유지해 온 잭은 감정이 결부된 관계가 두렵다. ‘손님’으로만 남자를 만나왔던 수지도 마찬가지다. 잭은 “땀이 식으면 너도 똑같다”며 자신에게 조금 더 다가서려는 수지를 조롱한다. 수지 역시 자신을 밀어내는 척하는 잭이 야속하고 자존심이 상해 그의 위선을 비난한다.

그렇게 사소하고 황당한 이유로 수지는 베이커 형제를 떠나고, 잭은 방황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의 상처는 서로를 할퀴고 남은 자국보다 더 큰 그리움이 되고, 미처 하지 못한 사과는 되찾고 싶은 사랑의 명분이 된다.

한참 동안을 술과 후회 가득한 시간으로 찌들어 살던 잭은 어느 날 수지의 아파트에 찾아간다. 여전히 진한 화장과 초라한 코트를 걸치고 있지만 늦은 밤 피아노 위에서 자신의 손길 한 번에 무너져 내린 그때 그 붉은 드레스의 여자만큼이나 수지는 여전히 아름답다. 이제는 광고의 CM송을 부르고 있다며 담담한 척 말을 건네는 수지의 눈이 오디션을 보던 순간만큼이나 흔들린다. 이 영화는 그렇게 음악과 사랑을 ‘듣기 좋게’ 비벼놓는다. 콜걸 출신 여자의 고상하지 못한 사랑 고백과 자기혐오에 가득한 남자의 재즈 연주는 묘하게 조화롭다. 위선과 허울이 빠진 인생은 곱지 않지만 진솔하다.

영화평론가

김효정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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