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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다른 두 사람… 서서히 물들어 ‘한 쌍’이 되다

기사입력 | 2018-01-12 14:50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의 촬영지인 국립현대미술관 앞(왼쪽)과 서울동물원 내 오솔길. 영화 주인공들은 현대미술관 앞 길에서 미술관과 동물원으로 헤어져 갔다가 나중에 이곳에서 첫 키스를 한다.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의 촬영지인 국립현대미술관 앞(왼쪽)과 서울동물원 내 오솔길. 영화 주인공들은 현대미술관 앞 길에서 미술관과 동물원으로 헤어져 갔다가 나중에 이곳에서 첫 키스를 한다.


(105)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의 배경… 과천 서울대공원·국립현대미술관

철수·인공 두 남자의 동물원
소풍·사생대회 ‘추억의 장소’
활동적이고도 소란스러운 곳

춘희·다혜 두 여자의 미술관
생소하면서 고급스러운 공간
정적이고 고요해… 극적 대비

서로에게 풍덩 빠지기보다는
다르지만 자기 본연 모습으로
나란히 걸어가는 사랑 보여줘


말년 병장인 철수(이성재)는 휴가를 보내기 위해 여느 때처럼 애인 다혜의 월세방을 찾는다. 그러나 그 집에는 두 달 전부터 춘희(심은하)가 살고 있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다혜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남기고 표표히 사라진다. 철수는 말없이 차를 몰아 과천으로 향한다. 영문도 모르고 헤어진 연인 사이에 끼어든 춘희를 옆에 태운 채. 그들은 미술관과 동물원 표지판이 나란히 걸려 있는 갈림길에서 각자 취향에 따라 헤어진다. 만남부터 석연치 않더니 이 두 사람,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런데 요상하게도 시간이 갈수록 춘희와 철수는 서로에게 빠져든다. 영화 속 유명한 대사처럼, 풍덩 빠지는 사랑이 아니라 서서히 물드는 사랑이 이들에게 찾아온다.

이정향 감독의 1998년 작 ‘미술관 옆 동물원’(사진)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공간은 춘희와 철수가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되는 춘희의 월세방이다. 여기서 그들은 함께 공모전에 낼 시나리오를 쓰고,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본다. 그러나 제목이 말해주듯 영화의 전반적 콘셉트나 테마를 고려할 때 미술관과 동물원의 비중은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공간은 춘희와 철수의 캐릭터를 대변할 뿐 아니라 그들이 쓰는 시나리오의 제목이기도 하고, 시나리오 속 인물인 다혜(송선미)와 인공(안성기)이 만나고 사랑하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서울, 경기 남부지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과천 서울대공원은 소풍 혹은 사생대회의 추억이 깃든 공간일 것이다. 대개 놀이공원의 유혹에 넘어가곤 했지만 동물원에서 친구들과 야생동물을 구경하며 흉내도 내보고 깔깔 웃어대던 기억 또한 진진하다. 동물원 옆에 미술관이 있다는 사실은 그때도 어렴풋이 알았지만 방문해 볼 생각은 없었다. 그러고 보면 20세기의 10대들에게는 전시 관람이 꽤 고급스러운 취미였던 것 같다. 지금처럼 지역 미술관들이 많지도 않았을뿐더러 전시에 관한 정보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머그컵이나 문구류에서 고흐와 모네, 피카소의 그림을 흔히 볼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미술관의 존재뿐 아니라 미술관을 좋아하는 사람과 그림 감상이라는 행위에 대한 의미를 확실히 부각시켜준 작품이다.

1986년 8월 25일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은 덕수궁관, 서울관, 청주관 등과 함께 국내외 미술의 전시, 수집, 보존, 연구, 교육 등을 담당하고 있다. 개관 당시에는 교통이 불편하고 동물원과 놀이공원의 위세에 눌린다는 우려의 목소리와 함께 실제로 찾는 이들도 많지 않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관람객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지역 명소로 자리 잡았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국내 최초 행위예술 퍼포먼스를 유치하는 등 좋은 프로그램을 선보인 결과이며 1990년대 중반부터는 지하철 4호선 과천역을 통해 접근이 용이해진 점도 큰 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건물은 건축가 김태수가 한국의 전통적 공간 양식에 현대적 기능을 더해 설계한 것으로 봉화대형 램프코어를 중심으로 동편 3개 층, 서편 2개 층에 모두 8개의 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기획전이 열리는 1, 2전시실과 미술 분야별 전문성을 살린 6개의 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춘희와 철수의 시나리오 속 다혜는 전통미와 현대미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 아름다운 공간에서 작품을 관리하고 전시실의 질서를 유지하는 일을 한다. 카메라가 보여주는 유일한 관람객은 그가 짝사랑하는 수의사 인공이다. 다혜는 인공의 자취를 따라 미술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그가 오래 감상하던 작품 앞에서 그와 비슷한 포즈를 취해 보기도 한다. 다혜와 인공이 지나치는 장소들은 미술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영화는 건물 내부의 수직적, 수평적 조형성을 강조하며 서로 교차시키기도 하고 한 장면에 담기도 한다. 다혜가 나선형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인공을 좇는 장면은 작품을 중심으로 유리 천장까지 뱅글뱅글 길이 나 있는 1원형 전시실에서 촬영됐다. 이곳에는 현재 대형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우뚝 솟은 백남준의 ‘다다익선’이 전시돼 있다. 깊이감과 개방감이 강조된 거대한 건물 안에서 좋아하는 사람을 찾고 있는 다혜의 다급함이 느껴진다. 다음 장면에서는 각기 다른 층에서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인공과 다혜가 실루엣으로 잡힌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기도 하고 시각적으로도 예쁘지만, 수직으로 놓인 두 개의 층에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그리며 걷는 두 남녀의 모습은 초반부 원만하지 않은 다혜와 인공, 혹은 춘희와 철수의 관계를 표상하기도 한다.

한편, 인공의 직장인 동물원은 미술관과 여러모로 대비를 이루는 공간이다. 미술관이 정적이고 고요하다면 동물원은 동적이고 소란스럽다. 동물들은 대부분 야외에서 사육되고 그림과 달리 살아 움직인다. 영화가 촬영된 서울동물원은 약 242만㎡의 부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1984년 개원해 연간 약 350만 명의 관람객이 들고 있다. 천연기념물 19종을 포함해 277종 2788수(2017년 12월 기준)의 동물을 보유하고 있으며 축사 사이에 산책하기 좋은 길이 있고, 삼림욕장까지 구비돼 있어 지역 주민들의 나들이 코스로 적극 활용된다. 리프트를 타고 전망하는 숲과 동물원의 풍경은 도시인의 가슴을 탁 트이게 만들고, 상쾌한 나무 향이 마음을 들뜨게 한다. 혼탁했던 영혼이 정화되는 기분이랄까. 범인(凡人)도 영감을 얻기에 충분히 특별한 공간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일하는 인공은 꽤 건조한 인물로 묘사된다. 감성적인 다혜에 비해 냉철하고 이성적인 그는 최선을 다해 다가가려는 다혜의 진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사적이면서도 뚝뚝하게 군다. 하지만 인공도 다혜와 마주치고 대화하는 동안 그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는데 그 과정을 보여주는 공간이 동물원 안 숲길이다. 처음에 인공은 이 길을 동물원 전용카트와 승용차로 오가지만 자전거 타는 다혜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 후 그도 자전거를 타고 콧노래를 부르며 이 길을 지난다. 어느 날 자동차가 고장 나자 그는 지나가던 다혜의 자전거를 얻어 타는 신세가 된다. 그가 다혜 대신 자전거 앞자리에 앉아 페달을 밟으며 두 사람은 정서적·물리적으로 가까워진다. 이 장면은 서울동물원 정문 반대편 끄트머리에서 촬영됐다. 커다란 나무들 사이로 나 있는 도로와 이 앞 장면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들소다리’는 이곳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미술관 옆 동물원 영화촬영 장소’라는 팻말과 함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미술관 옆 동물원’의 미술관은 춘희와 다혜의 캐릭터를, 동물원은 철수와 인공의 캐릭터를 드러내는 대유적 공간이다. 한국어 문법상 ‘미술관 옆’이 ‘동물원’이라는 단어를 수식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지만, ‘미술관’과 ‘동물원’은 대등한 관계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미술관의 정적인 특성 때문에 여성을 온순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규정한 것은 아닌가 하는 시각 또한 섣부르다. 춘희와 철수가 동거하는 열흘 동안 춘희는 일을 하고 철수는 청소와 요리를 한다. 털털하고 마음이 넓은 것은 춘희고, 까다롭고 잔소리가 많은 것은 철수다. 춘희는 철수보다 자기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도 그를 오빠라고 부르지 않고, 철수도 권위적이거나 폭력적인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따라서 전통적인 젠더 비평을 대입하기에 두 사람의 캐릭터는 입체적이다. 섹스에 대해 조심스러워하는 춘희와 비교적 개방적인 철수의 입장 차도 전통적인 시각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이들의 성격 차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바로 이 지점에서 철수가 동물적 욕구가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공간, 즉 동물원을 좋아하는 인물로 더 적합하다는 점만큼은 명확해진다. 중요한 것은 다른 취향과 성격의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려고 애쓰면서 사랑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미술관과 동물원이 각자의 기능을 다하면서 ‘옆’에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이 감독은 춘희와 철수, 다혜와 인공도 서로의 색에 물들어 버리기보다는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나란히 서기를 바란 것이 아닐까.

다혜와 인공이 연인이 되는 과정에는 춘희와 철수의 심리적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각자 좋아했던 사람들은 그들 마음속에서 차츰 사라지고 그 빈자리에 서로에 대한 감정이 들어찬다. 그러나 둘 다 섣불리 고백하지 못하는 사이 오해가 싹트고, 철수의 귀대 날짜까지 닥치고 만다. 영화의 마지막 신에서 춘희와 철수는 다시, 그러나 이번에는 따로 과천을 찾는다. 춘희는 철수를 찾아 동물원으로 가지만 철수는 춘희를 생각하며 미술관을 둘러보고 있다. 다혜가 천문학책을 읽는 장면, 인공이 자전거를 타고 으레 그 길을 내려오면서 다혜를 뒤에 태우고 가는 장면 등이 철수, 춘희의 모습과 교차되다가 어느 순간 합쳐진다. 타박타박 혼자서 길을 걷고 있는 철수와 춘희에게 행복의 기운을 전파하듯 한 자전거에 탄 인공과 다혜가 그들을 스쳐 지나가는 장면은 시나리오 속 연애담처럼 그들의 만남도 ‘해피엔딩’일 것을 예고하는 복선과 같다.

미술관과 동물원의 방향이 나뉘는 갈림길은 미술관 근처에서 촬영한 것으로 영화에 서 있던 아기자기한 표지판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세 갈래로 난 예쁜 돌길만 봐도 ‘미술관 옆 동물원’의 설렘이 잔잔히 밀려온다. 매년 쌀쌀한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한 번씩 꺼내보게 되는 작품이다.

글·사진= 윤성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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